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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C(25)

by 베를리너

“동혁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요. 주성 씨 나 도와준 것처럼 동혁이 도와줘요.

지금이라도 자백하면, 선처해 줄 수 있죠?”

“로운씨, 한국 정부에서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김동혁 아니 이제훈이 정부에서 일하는 거요. 한국에 있을 때 스타트업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빚을 좀 졌나 봐요. 우리와 협상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단호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난 동혁 아니 제훈에게 빨리 이야길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사업을 했었다고요?”

“제훈의 마음 잘 돌려봐요. 제훈이 왜 로운 씨에게 자신의 이야길 꺼냈는지 생각해 보고요. 난 아니지만, 로운씨는 제훈의 앞날을 바꿀 수 있어요.”

주성의 얼굴엔 동혁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스며 있었다.

돌연 한국인이라고 밝히는 동혁 아니 제훈과 동성연애자 주성은 코앞에 닥친 과제 통과와 졸업이라는 관문보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집 앞에 다다르자, 휴대폰이 손 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듯했다.

전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전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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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의 방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전기 불빛을 보니 갑자기 통역 일이 떠올랐다. 내 방으로 급히 돌아왔다. 말일이 가까워져 온다. 방세는 제대로 내야 내 조언이 먹히지 않을까? 식당 알바를 그만둔 후, 통역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와 숨통이 조금 트였었다. 닥친 현실이 동혁에 대한 걱정을 순식간에 덮어버렸다. 여성 재단 통역 요청 건에 답신을 보냈다. 한국시간이 오전이어서 빠르게 답장이 왔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동혁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난번 대화 이후, 피하는 것 같다. 북한인에서 한국인으로 훌쩍 변신한 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동혁의 그늘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 통역비를 받아, 다음 달 방세를 해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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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경제적으로 심각하게 어려워졌어요. 이곳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마음 터놓으면서 회복하고 있어요. 지금은 일자리에 적응하고, 애들도 잘 키우고 있어요.”

여성 재단과 함께 인터뷰하면서 독일 여성의 홀로서기에 대해 리포트를 작성했다.

독일 여성의 경제적 독립 또한 쉽지 않았다.

“공동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곳에서 큰 위로를 얻은 듯, 눈시울을 붉히는 또 다른 이혼 여성은 공동체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아이는 남편이 키우고 있어요. 아이를 못 보니, 마치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어요.”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서로를 믿고 가장 아픈 속내를 꺼내어 놓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썼다.

“외국인으로서 인문학을 공부한 최로운 학생의 끈기와 열정을 높이 삽니다.”

젠더 사회학 교수님은 내 졸업 논문을 담당했고 추천서까지 써주었다.

“공부 계속하면 어때요? 장학금 추천서 써줄 수 있는데.”

교수님은 나에게 말했다.

난 공부나 학위에 욕심이 나지 않았다. 대신 빨리 한국에 돌아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자립하고 싶었다. 독일 공동체에서 만난 여성들처럼.

친구들은 이미 하나, 둘 출산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독일에는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없으니, 독일 친구들은 초조해지는 날 이해하지 못했다. 7년이나 독일에 있었지만, 나를 움직이는 건 한국 사회라는 것이 씁쓸했다.

“말씀 감사합니다만, 어머니도 편찮으시고, 부모님을 도와야 해서요.”

아버지는 얼마 전 내놓았던 ‘백 년 식당’을 다시 인수했다. 맛있는 불고기로 승부를 본다고 말했다.


세 번째 통계학 시험 후 드디어 합격자 리스트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난 미리암과 함께 뛸 듯이 즐거워했다.

이렇게 합격할 줄 알았다면. 지난 7년여의 세월이 눈앞에서 하얗게 부서지듯 흩어졌다.

너무 견디지만 말걸. 맥주 한잔 마시며 긴장도 풀걸. 나사 조이듯, 나를 옥죄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졸업이 성큼 다가왔다. 이렇게 불쑥.

이제 동혁도, 알바도 아닌... 플랜 C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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