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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보러 가는 길에(23)

한인마트에서 받은 위로

by 베를리너

“도서관이 아니라, 여기 있었어?”

벤에게 대답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벤의 어깨를 툭 친다.

리자다. 몸집보다 큰 자전거를 끌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벤은 리자를 보자, 가벼운 표정으로 웃으며 한두 마디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는 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와 있을 때와 사뭇 다른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흡사 먼 곳을 떠났다가,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래, 내일 수업 때 보자!”

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벤에게 말했다.

“어…. 잠깐. 가려고?”

벤은 나를 잡는 듯하더니, 금세 ‘차오!’라며 손을 흔든다. 난 할 말을 삼킨 채, 물기 머금은 솜처럼, 터덜터덜 전철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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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긴 이른 시간, 교회 쪽으로 걸었다. 딱히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예배당에 앉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비추는 햇살을 보고 싶었다. 교회 앞에서, 마침 걸어 나오는 박 권사님과 딱 마주쳤다. 내 손을 끌고, 한인 상회로 갔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박 권사님은 이것저것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더니, 호기롭게 계산한다.

엄마가 병원에 있어, 한동안 한국 식품을 받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이혼한 독일 남편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살기 빡빡 할 텐데. 권사님은 잘 챙겨 먹으라 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도, 필요한 걸 줄 수 있을까. 권사님이 간호사였을 때 얼마나 많은 환자가 위로받았을까.

선물로 받은 식료품 봉지를 한동안 풀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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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들어가니, 독일 친구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로운, 너 지난번 워크숍 안 왔어? 점수에 반영된대.”

“뭐라고? 그런 말 없었잖아.”

“리자가 방금 메일로 보냈어. 아까 교수님과 한참 면담하고 나서.”

워크숍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못 간다고 말했었는데.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난 억울함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젠더 사회학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의 사무실은 사회과학 대학 건물 2층 가장 안쪽에 있었다.

난 심호흡을 한 후, 문을 두드렸다.

“네.”

“교수님, 혹시 지난번 워크숍 대체 과제를 제출해도 될까요?”

난 간절함을 숨기며, 담담한 표정으로 교수님에게 물었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네요. 이 수업은, 내년 봄학기에 개설될 예정이에요.”

풍성한 금발에 한껏 힘을 준 젠더 사회학과 교수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가까이서 바라본 교수님의 피부는 파운데이션이 떠서 푸석거렸다.

내년 봄학기라면, 졸업이 반 학기나 늦어질 수 있다. 심장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교수님. 혹시 베를린에 있는 이혼/미혼모 여성 공동체 인터뷰한 내용 리포트로 정리해서 제출하면 안 될까요?”

수업 때 배운 이 여성 공동체는 교수님이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분야다.

“혹시 ‘퍼플’이나 ‘레인보우’ 말하는 건가요?”

교수님이 내 쪽으로 몸을 비틀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난 과장된 어조로 빠르게 대답했다. 교수님의 표정이 밝게 바뀐 걸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인터뷰할지 모르지만, 내용이 충실하면 가능합니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얼마 전 한국 여성 재단에서 통역을 요청한 건이고, 통역할 때 내용을 정리해서 리포트로 제출하면?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날 바라보는 교수님 앞에서, 난 과제를 완성이라도 한 듯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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