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갔다.
벤이 등을 도서관 벽에 대고 바닥에 털썩 앉아있었다. 책을 펼치고 앉아 집중한 모습을 보니, 말 걸기가 어려웠다.
그냥 지나칠까 망설이다, 마침 고갤 든 벤과 눈이 마주쳤다.
“어, 웬일이야?”
“도서관에 무슨 일로 오겠어? 소풍 왔을까 봐?”
벤은 눈이 살짝 커진 채,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처진 어깨가 맘에 걸려,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차 한잔할래?”
벤이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나 밥을 안 먹어서.”
벤은 가방을 들고 툭툭 털더니 성큼성큼 앞장섰다. 우린 학교 앞 이탈리안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난 감자튀김과 소시지를 시켰다.
식당엔 점심 피크타임이 지나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곧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오고 있었다. 테이블 위 작은 꽃병에 주황색 메리골드가 꽂혀있다. 난 꽃을 손끝으로 살짝 만져봤다. 좀 시들긴 했지만, 꽃잎이 보드라웠다. 코를 대보니, 은은한 향기가 맴돈다.
“통계학 시험 준비 잘 돼가?”
벤은 스파게티 면을 포크로 뜨다 말고 내게 물었다.
“잘 안되면 어떡해! 세 번째 시험인데. 열공 중이야.”
이번엔 내가 궁금한 차례인 것 같은데.
“무슨 걱정 같은 거 있어?”
한참 뜸을 들이다 벤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길래, 레몬을 띄운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긴 카푸치노가 맛있는데!”
벤이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카푸치노? 아까 커피 마셨는데.”
“그래?”
“오늘 무슨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른 거 아냐?”
난 다시 한번 벤에게 물었다.
“항상 무얼 말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커피 한잔 앞에 놓고, 마시기만 해도 돼.”
그 말을 듣자 왠지 마음속 나사 하나가 풀린 듯 마음이 스르르 느슨해졌다.
벤이 무슨 일 때문에 처져 있는지 일렁이던 궁금증도 잠잠해졌다.
벤이 카푸치노 거품이 묻은 입을 손으로 쓱 닦았다.
“계산이요. 잔돈은 팁이에요.”
벤이 지나가던 종업원에게 말한다. 종업원이 날 지나치자, 내 것까지 계산을 한 걸 알았다.
“아냐, 내 건 계산할게!”
독일인과 더치페이에 익숙해진 내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벤은 웃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한다.
생각지 못한 점심 초대에 별안간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데이트처럼.
여전히 말 없는 그를 따라 쿠담 거리를 걸었다. 고급스러운 부티크엔 시계, 가죽 가방, 구두가 감각적으로 진열돼 있었다. 쇼윈도의 마네킹은 부드러운 브라운 계열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쿠담 광장 노천카페에선 커피 향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사람들은 한쪽 의자에 쇼핑백을 두고 만족한 웃음을 띠며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동물원 역 1층에 있는 마트에 학생들이 우르르 장 보러 들어가고 있다. 비교적 비싼 마트인데, 전철역과 연결돼 귀가하는 길에 들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마트에 내가 좋아하는 스파게티 소스가 있는데!’
갑자기 집 냉장고 속이 떠오른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시원했던 바람이 변심한 듯 차갑게 스며든다. 조금 있으면 이곳에 대형 크리스마스 시장이 들어서겠지. 보석처럼 반짝이는 조명들이 겨울이 오는 걸 잠시 늦출 수 있을 거다.
“막상 아버지를 만날 생각 하니, 좀 어색해.”
“아버지 처음 만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오래 떨어져 살다 보니. 아버지는 독일어를 잘 못하시니까.”
벤은 아버지와의 만남을 상상하며 염려하고 있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위축돼 보였다. 그에 반해 난, 솔직한 감정을 터놓는 벤을 보며, 우리가 특별한 사이처럼 느껴져 내심 반가웠다.
“아버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 그리운 아들이 독일서 왔는데!”
난 어떻게든 벤의 텐션을 올리고 싶어 말했다.
“... 넌 졸업 후 바로 한국에 돌아갈 거야?”
마음 놓고 멍하게 있는데 벤이 물었다. 오늘 나눈 대화 중 가장 힘 있는 말투로.
벤의 얼굴에 비춘 막막함이 전해져, 난 잠시 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