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거웠다. 냉장고 속 게롤 슈타이너 한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톡 쏘는 김은 빠져있었지만, 머릿속이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았다.
딩동!
‘이 시간에 누구지?’
밖을 볼 수 있는 구멍으로 슬쩍 내다보니, 하나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문 열어!!”
가슴을 진정 거릴 새도 없이, 하나가 거칠 게 문을 두드렸다.
“왜? 여기까지 웬일이야?”
난 파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입을 떼며 물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뭐?”
“개도 고마움을 알아. 우리가 널 어떻게 도왔는데, 은혜를 이따위로 갚냐고!”
“네가 뭘 잘못 알았나 본데, 내가 입은 정신적 피해는 아직 진행형이야.”
하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식당 아저씨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소름이 돋았다.
“따지러 온 거야?”
“그래! 억울해서 따지러 왔다. 걱정하지 마. 우리 이사 갈 거야. 아빠 식당도 그만뒀어.”
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길 해대는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렇구나….”
난 머릿속으로 하나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옷’ 생각이 났다.
“혹시 옷 돌려줄까?”
“미쳤어? 내가 그걸 다시 입을 거 같아? 너한테 줬으니까 니 거야. 단, 앞으로 아빠의 일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말고.”
이야기가 끝날 것 같아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잠시나마 널 친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병신이지.”
하나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허탈한 표정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들이 지진을 일으킨 것처럼 흔들렸다. 한국인이라고 커밍아웃한 동혁이 그리고 베트남으로 떠날 거라는 벤까지.
하나의 무례한 행동이 화가 났지만, 그가 어떤 순간에 진심으로 나를 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머릿속 ‘정지’ 버튼을 누르듯, 핸드폰으로 라디오 앱을 켰다. DJ 가 말했다. ‘자 휴식해 보세요. 클래식 라디오.’ 목소리에 에코 기능이 있는 것 같은 DJ의 멘트가 깊은 산에서 메아리치듯 방에 흩어졌다.
현관문으로 나가는데, 식탁 위 동혁이 먹고 남은 건조한 빵 부스러기가 보였다. 그가 한국 사람이라고 고백한 게 의외이긴 했다. 날 위로하고 싶어 아무 말이나 던진 걸까? 우리 곁을 맴돌던 요나스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 사실을 몰랐으면.
요나스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두 번이나 날 도운 그 사람 걱정이 들었다.
마지막 기회인 통계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끝이다. 난 도서관 문을 열고, 나만의 지정석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밟으니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듯 긴장감이 밀려왔다. 웅장한 성채 같은 외관이 오히려 날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로운아, 일찍 왔네!”
자리에 앉아서 소곤거리는 석철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석철의 책상 위엔 소지품들이 독일 마을처럼 각 맞춰 정렬돼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숨이 꽉 막히는 것 같았지만, 나에게 ‘열공’ 하라는 석철에게 웃어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내 ‘지정석’은 비어있었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이 자리는 든든한 성벽 안에 있는 것 같다. 창밖으로 초록 가지가 흔들리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끽!”
난 의자를 세차게 밀치며 일어났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금발 독일 여자가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창밖, 벤이 우울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현관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가 시야에 들어오자 복도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