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종로에 출근한 지 벌써 1년이 됐다.
동경했던 인권 단체 앰네스티나, 연합뉴스 같은 언론사 취업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냈지만, 결국 한국에 설립된 독일계 회사의 대표 비서 겸 홍보부 직원으로 입사했다. 서른이 넘은 신입 직원이 갈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새 직장에 적응하고, 한국식 상하 조직 문화를 배우느라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주말엔 소개팅에 나가, 또 다른 동맹자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 퇴근 후,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과 약속이 있어 바삐 전철역으로 걸었다.
“어, 동혁, 아니 제훈!”
난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항상 쫓기는 듯한 표정도 한결 누그러졌다.
“오랜만이야.”
“여긴 웬일이야?”
“여자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의외의 대답에 놀랐지만, 종로는 누구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잘 지내지?”
“보는 대로! 직장이 근처야?”
“맞아.”
명함을 건넸지만, 연락을 바란다기보단, ‘나도 잘 지내고 있어.’ 정도의 뜻이었다.
제훈과 헤어지고, 전철에 앉았다. 인스타그램 알람이 떴다.
‘수상한 동맹자’
새로운 팔로워 아이디를 클릭해 보니 제훈의 사진이다.
프로필엔 한국의 명산에서 찍은 사진이 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작은 기숙사 방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베트남에 여행 갔을 때, 벤에게 엽서를 보냈다.
나뜨랑에서 산 엽서에 베트남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오토바이를 타다 화상을 입었지만, 그조차 추억이 될 만큼 다시 오고 싶은 곳이라 적었다.
다음 주엔 독일로 출장을 간다.
내 손을 잡아끌고 함께 장을 봐주던 교회 권사님도 만나고, 자유를 찾아 떠난 고모도 만나기로 했다.
내가 끝내 정착하고 싶은 곳이 한국인지, 독일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벤이 말한 것처럼 굳이 계획하지 않기로 했다. 젠더 교수님 말씀처럼 ‘여성은 자기 능력을 끝없이 의심한다’라는 함정도 피하기로 했다.
이제 독일에서처럼, 시간을 견디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도 아직 짝을 찾지 못하고, 직장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젠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살기로 했다.
독일에서 받은 졸업장으로 한국에 날아왔지만, 이제 졸업장 밖에서 점수를 받아야 한다. 새로운 날개를 찾을 때다. 시작은, 늘 설렌다.
집에 가니, 우편함에 엽서가 한 장 꽂혀있다.
“네가 떠난 베를린에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어.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네.
한국에도 연휴가 있겠지?
크리스마스엔 선물 같은 일들이 네게 찾아오길.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보내. 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