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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무수한 친절

by 공글이

이번 글을 기다렸다. 마지막 항암치료 때 고마웠던 사람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작년 4월에 소아암 보호자로 입대하라는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시술과 수술, 방사선, 항암을 거쳤다. 추적검사 기간이 남았지만 의사의 "보통 아이들처럼 키워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제대하는 기분이다. 시간이 꼬박꼬박 흘러서 다행이다.

시술 때는 소아응급실에서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갔다. 작은애가 한 달 동안 토하고 사시가 된 게 머리에 물이 차서 그 압박 때문이란 걸 그제야 알았다. 개두술 때는 수술동의서를 쓰면서 의사로부터 여러 후유증을 듣고 암담했다. 종양을 제거하는 10시간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하루 자고 나온 아이는 프랑켄슈타인 같았다. 퇴원하기가 겁이 났다. 작은애 머리에 손도 못 대겠는데 머리를 감겨주라는 말에 난감했다. 수술은 잘 됐지만 종양이 남았다.

방사선치료 때는 6주간 소아암 쉼터에서 지냈다. 방사선을 10분 쬐려고 매일 병원에 갔다. 주말에만 집에 내려와 큰애가 힘들어했던 기간이다. 작은애도 쉼터 창밖을 바라보며 집을 그리워했다. 방이 없어 거실이 우리 공간이었다. 하루살이처럼 느껴졌다. 8차까지 이어진 항암치료에서는 항암생활규칙 때문에 작은애의 짜증이 잦았다. 하기 싫은 걸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걸 참아야 하는 일상이었다. 나는 프로수발러로 거듭났다. 끼니마다 신선한 음식을 올리느라 장금이가 되었다.

격리된 소아암병동에 들어갔을 때는 압도당했다. 보호자 침대에 누우면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6인실에서 커튼 쳐놓고 무소음으로 울었다. 작은애는 돌아누워 웅크린 채 울었다. 항암주사실에서 종일 주사를 맞기 위해 새벽 첫차로 가서 막차로 내려오는 병원 일정을 소화했다. 이제 병원 짐 싸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서울과 대구를 다녔다. 평생 탈 택시를 병원 다니면서 다 탔다. 암환자는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것, 온갖 종류의 암, 산정특례제도를 알게 됐다. 보건소와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소아청소년 의료완화팀, 병원학교를 드나들었다.

작은애가 왜 암이 걸렸는지, 어떻게 종양이 자기 머리로 들어왔는지 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네가 뭘 잘못해서 걸린 게 아니라고 말해줬다. 작은애가 병원에 같이 가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적어왔을 때 마음이 복잡했다. 네가 아픈 걸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아줬다. 아픈 너를 돌보는 게 부모로서 마땅하다고, 끝까지 너를 사랑할 거라고, 네가 우리 딸이어서 여전히 좋다고, 너와 가족이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간 무수한 친절을 경험했다. 덕분에 나도 친절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겠다. 우주가 우리를 응원했다. 세상이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라고 느꼈다.

큰 병원으로 연계해 준 소아과 의사, 작은애를 담당한 의료진들, 소아암 쉼터를 안내해 준 회장님, 큰애 돌봄을 메꿔줬던 이웃 할머니, 큰애를 방과 후에 따로 봐주신 담임선생님, 기차 놓치지 않게 달려준 택시기사님, 작은애가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어린이집, 유일한 바깥 활동이었던 미술학원, 작은애와 놀아주려고 우리 집에 와줬던 정은언니, 병원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 소아청소년 의료완화팀과 병원학교 선생님, 교통비와 치료비를 지원해 준 소아암협회와 보건소, 심리치료를 받게끔 도와주신 권사님과 치료사, 학교생활을 살펴주시는 작은애 1학년 담임선생님, 기도와 물질로 도와주신 성도들과 지인들, 내가 자빠지지 않게 매주 우리 집에 와준 집사님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한걸음에 와주신 은주사모님, 이틀 연속 항암주사 맞는 날에는 1박 신세를 졌던 정아언니, 영남대병원에 가는 날이면 만나던 하나언니, 글쓰기를 놓지 않게 해 준 울산저널, 나를 다독여줬던 가족들과 이웃들, 상담자 수련을 이어갔던 동반자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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