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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맘 Oct 07. 2024

반찬과 집밥은 둘 다 사랑이다

10월로 달력의 얼굴이 바뀌면서 집안 살림도구들도 재배치에 들어갔다.

침대의 쿨매트는 장롱 안쪽으로 후퇴시키고 숨어있던 긴팔옷들을 차츰 앞장세우게 되었다.

수도꼭지도 그동안 외면했던 온수 쪽으로  몸이 기억하는 방향과 감각대로 계절을 맞이했다.

온수로 아침 설거지를 하던 중에 뒤늦게 알아차린 생각 하나로 갑자기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게 되었다.



     

며칠 전 큰올케 언니의 전화 통화였다.


“고모, 개천절에 오빠가 비번이라 같이 서울 가서 점심 사주려고 하는데 괜찮죠?”

“좋아요, 언니 그날 봬요”


인천에 사는 큰오빠 내외는 종종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올라오곤 했었다.

추석연휴에도 아쉽게 얼굴을 못 본 터라 그저 반가운 점심약속 제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별다른 의심 없이 그러자고 했는데 약속 당일인 오늘에야 비로소 숨은 의도가 생각났던 것이다.

곧 다가오는 내 찐 생일(음력)을 앞두고 일부러 올케언니가 약속을 정한 것이었다.



     

요즘은 생일을 두 번씩 챙기는 추세다.

기억하기 쉬운 카톡(양력) 생일이 있고 사주팔자를 볼 때 쓰는 음력생일이 찐 생일처럼 있다.

카톡생일은 SNS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미리 챙겨 주고 찐 생일은 주로 가족들이 기억한다.

두 번의 생일은 의미를 부여하는 기쁨도 두 배이고 생일이 확장되는 느낌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

양력생일은 계산방식의 번거로움이 없고 가족과 지내는 찐 생일(음력)에 방해받지 않아서 여유롭기까지 했다.

기억하기 쉬운 양력 9월에 이미 카톡생일 축하를 받은 터라 찐 생일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나 보다.



     

정오 무렵 큰오빠 내외가 집 근처 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남편이 마중을 나갔다.

그 사이 나는 점심준비로 분주하게 식탁을 세팅했다.

언니가 점심을 쏘겠다고 했지만 오랜만에 집밥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사실, 친정식구에 대한 초대는 부담도 덜하고 마음이 편한 이유도 있었다.

보글보글 된장찌개도 끓이고 며칠 전 새로 담근 잘 익은 오이소박이도 준비했다.

주메뉴로는 동네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영양족발을 미리 주문 배달해 놓기도 했다.



    

반갑게 현관문을 열고 마주한 올케언니는 집에서 준비하느라 고생을 한다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뒤 따라 들어온 큰오빠는 묵직한 가방 하나를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가방 안에는 올케언니가 직접 만든 미역국과 LA갈비, 불고기와 장조림 등 좋아하는 밑반찬들로 가득했다.

과거 음식장사를 했던 올케언니지만 반찬의 양과 퀄리티에 놀랍기만 했다.

다가 올 시누이의 생일상을 위해서 미역국까지 직접 끓여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지하철을 타고 반찬의 무게를 견디며 손에 들고 온 오빠와 올케언니의 마음 보따리였다.



     

내가 준비한 소박한 집밥을 보며 그릇도 예쁘고 맛있어 보인다며 기분 좋게 식탁에 앉았다.

포장 배달된 족발이었지만 예쁜 꽃무늬 접시에 다시 세팅해 놓으니 그럴싸해 보였다.

직접 끓인 된장찌개 국물을 시작으로 부드러운 족발을 상추와 양배추쌈으로 해서 맛있게 먹었다.

알맞게 익은 오이소박이도 상큼하게 식욕을 올려 주었다.

반찬가게에서 사 온 열무김치고구마순 볶음도 입맛을 거들었다.

남편은 레몬을 곁들인 하이볼을 직접 오빠에게 반주로 만들어 주면서 칭찬도 받았다.

친정부모님의 빈자리를 큰오빠와 올케언니가 대신해 주는 것 같아서 애틋함이 느껴졌다.

화려함은 없었지만 편안한 집밥으로 대접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의 브런치 글쓰기와 올케언니의 새벽예배처럼 각자가 좋아하는 루틴이 생겨서 다행이라며 행복한 토크가 오갔다.

 


    

감동의 반찬을 선물하고 나의 소박한 집밥에 활짝 웃어주던 고마운 얼굴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식탁에 선물 받은 반찬들을 나란히 줄 세워 보니 나를 위해 분주했을 언니의 주방이 그려져서 찡했다.

주부의 수고로움을 아는 만큼 언니의 정성이 더 잘 보였다.

     

며칠 후, 생일 아침이다.

식탁 위에 올케언니의 손맛들이 차려졌다.

내 손으로 끓이기 그냥 그래서

하마터면 없을뻔한 미역국에게 찐한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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