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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 보통의 일상

by 초록맘

그날 밤 11시쯤 학교 기숙사에 있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엄마! 뉴스 보셨어요?”

“무슨 뉴스?”

계엄령이 내렸어요!”

“어?(뇌정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전화를 받은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아들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할 말을 잃어 보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나의 판단은 거실로 나와 TV를 켜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거실로 나오자 남편은 이미 딸과 함께 빨간 글씨의 뉴스속보를 숨죽인 채 시청 중이었다.

아마도 자고 있던 나를 굳이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불안함 속에서도 유일한 희망은 어렵게 국회 본회의장에 도착한 의원들의 정족수와 의결이었다.

출석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무서운 계엄의 불씨를 끌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남편은 공식 계엄해제 발표 전까지 소파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학창 시절 계엄을 경험했던 감정의 트라우마가 떠 오른다며 깊은숨을 내쉬곤 했었다.



어릴 적 내가 느꼈던 시대적 상황은 몇 가지 불안했던 기억으로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80년대 초,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당시 방송에서는 화염병이 오가는 불안한 교정과 시위대를 진압하는 군경들의 대치 상황이 연일 보도되었다.

수업 중에도 수시로 창문을 닫아야 했고 하교시간에도 맵고 따가운 최루탄 가스와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익숙했던 이유는 집회가 빈번했던 서울역 부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대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대모만 한다며 일방적으로 나무라셨다.

무슨 이유로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 불안을 삼킨 기억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엔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린 날까지 있었다.

평소처럼 집 근처에서 놀고 있던 나와 친구는 어리둥절했었다.

어렴풋이 주변에 계시던 어른들이 우릴 보며 걱정하던 말씀이 기억난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

“큰일 났네, 우린 다 살았지만 어린애들은 어떡하나”


그 순간 전쟁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상상해야만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83.9월 전투기 조종사였던 이웅평 하사의 귀순과정에서 울린 민방공 사이렌이었다.



44년 후 다시 불안을 상기시킨 비상계엄이 발령되었다.

어린 꼬마에서 지금은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현실이 더 무겁고 두려웠다.

대통령이 발령한 6시간 동안의 급박했던 계엄의 시간끝나고 날이 밝았다.

아주 짧았지만 일상과 비일상, 상식과 비상식의 기로에 섰던 지난밤이었다.



온 국민이 잠을 설친 불쾌함으로 가슴에 돌덩이를 안은채 일상을 맞이했다.

개인적으로 수요일 오전엔 초급 영어회화 강의를 듣기 위해 문화센터에 가는 날이었다.

예상대로 강의 시작 전부터 어젯밤 놀란 계엄령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강사님은 앞으로 외신뉴스에서 자주 볼 단어라며 “Martial Law(계엄령)”라고 칠판에 적으셨다.


까먹기 일쑤이던 영어단어인데 “Martial Law”는 휘발되지 않고 묵직하게 뇌리에 계속 남아서 신기했다.

계엄령영어표현조차 또렷이 기억될 만큼 강렬하고 무서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회화 수업에서 지금의 사회적 이슈인 martial law를 배우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 와중에 휴대폰 문자 알림을 확인해 보니 남편이 보낸 부고문자 1통이 전달되어 있었다.

곧이어 지방에 조문을 다녀와야 한다며 코레일 모바일 승차권 예매를 부탁하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지난 혼란의 밤처럼 예상 못한 가족의 죽음까지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경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싶었다.


문득, 군 복무 중인 아들을 둔 지인들의 남다른 불안함이 생각나서 휴대폰을 들기도 했었다.

수면 부족으로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아주 보통의 일상이 흔들렸던 12월의 그날 밤을 함께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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