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in나 essay 9
딸랑딸랑~ 문이 열렸다. 문이 닫혔다. 몇 차례 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는 첫째, 고개 숙여 인사하는 막내, 손 흔들며 인사하는 둘째, 조용히 미소 짓는 셋째, 숨을 헐떡이며 "다들 오셨네요?" 넷째를 끝으로 모두 모였다. 20대부터 70대의 나이를 아우르고 모인 커피 공부로 인연 된 5인방이다.
처음 만났던 그날, 서로를 낯설어하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도 한국 사람만 가능하다는 호구 조사를 첫째가 시작했다. 나이 순으로 정렬된 그녀들은 언니 동생이라 부르며 벽이 없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보였다. 다 함께 모인 날엔 그동안 쌓였던 사건과 속내를 털어놓기 바빴다. 함께 커피를 배우며 인연 된 그녀들을 똘똘 뭉치게 한 것은 어쩌면 커피도 다과 음식들도 아닌 '수다'인지 모른다.
그녀들은 주섬주섬 각자의 가방에서 먹거리를 꺼냈다. 서로 더 맛있는 것을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녀들은 구수하고 향기로운 커피와 촉촉한 빵, 아침 일찍 정성껏 쪄서 보온 가방에 담아 온 뜨끈한 고구마, 새콤달콤한 과일까지 곁들여 티타임을 갖는다. 5인방은 오늘 어떤 이야기를 가득 품고 발걸음을 재촉했을까.
"아유, 오늘 아침 너무 정신없었어."
말문이 열렸다. 누가 먼저 어떤 말을 꺼내도 부담 없었다.
"출발하려는데 나더러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뭔 요구가 그리 많은지, 병원까지 같이 가자고 졸라서 영감탱 혼자 갔다 오라고 하고 도망치듯 나왔어!" 모두 웃었다.
"난 우리 모이는 게 너무 좋아. 숨통이 트이거든!" 비슷한 마음인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여기 오면 내가 살아있는 게 느껴져."
"저도 재밌어요."
"맞아!"
"맞아!"
5인방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간절했던 모양이다.
그녀들은 달랐다.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무작정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맞설 용기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하여 그녀들의 욕구는 충족되는 중이다.
"언니 오늘 피곤해 보이네." 셋째가 말했다.
"그려." 첫째 언니가 덤덤하게 답했다.
"무슨 일 있었어?" 둘째가 물었다.
"엊저녁에 있잖여~ 아끼던 염소 한 마리가 죽었어..." 첫째는 말끝을 흐렸다. 모두 놀라 눈빛을 교환했다.
"언니가 엄청 아낀다던 그 염소?" 막내가 물었다.
"어떡해..." 모두 안타까워했다.
"그려, 엄청 이뻤는디..." 첫째가 고개를 떨궜다.
"어쩌다가..." 넷째가 물었다.
"이틀 전 갑자기 다른 염소랑 쌈(싸움)을 하더니, 다쳤지 뭐여~ 약 발라주고 주사 놔주고, 밥 잘 먹길래 나아지려나 했더니 엊저녁에 시름시름 앓더라고. 걱정돼서 새벽녘에 갔더니 누워서 일어나질 못하고 가부렀지 뭐여..." 안타까워하는 첫째 표정에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염소가 그렇게 나를 따르고 이뻤는디..." 어떤 말이 위로가 될지 모두 막막해했다.
"어쩔 수 있나... 때가 된 거지.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염소 생각에 다시 꿈틀대는 슬픔을 다독이듯 첫째가 말을 끝냈다.
인간의 본성은 약자와 동물을 대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첫째는 정이 많았다. 동생들을 보듬고 챙겼다. 서로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에서도 이렇게 티가 나는데 먹이고 돌보던 가족과 같던 염소에게는 어땠을까 말이다. 그동안 동생들을 대한 첫째의 행동들은 진심이었다.
"언니 허전해서 어째..." 셋째가 말했다.
"나아지겠지. 이제 우리 나이면 이 정도는 별 거 아니잖여!"
"그렇지." 비슷한 또래의 언니들은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보통 마흔 살 쯤부터 때때로, 아주 특별한 관계이거나 좋아하거나 소중한 사람의 죽음까지 극복해야 할 때가 시작된다고 했다. 죽음은 어떤 경우라도 누구에게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삶을 힘겹게 만들기도 한다.
"언니, 나 봐. 결혼하자마자 양가 어머님들 돌아가시더니 친구들이며 형제들이며 하나 둘 먼저 보내고... 이젠 뭐 번호표 뽑아두고 순서 기다리는 느낌이야!" 둘째가 말했다.
놀란 얼굴로 말없이 듣고 있던 막내를 바라보며 첫째가 말했다.
"아직 먼 거 같지~ 지금은 잘 모르지?
우리 나이 되믄 그랬구나 알겨! 젊을 땐 모르는겨~ 몰라야 정상이지! 내가 또 이런 말하믄 오지랖이라고 할지 모르지. 근디 사실이여!"
첫째는 모두를 둘러보고 이어 말했다.
"살아보니 또 별거 없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도 살았으니 된겨~ 아프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운 좋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어도 말여, 후회만 없으면 뎌! 남한티 피해만 안 주면 되는겨~ 방황도 젊을 때나 가능한겨~ 뭐든 해 봐! 실패하면 어뗘? 안 한 거 보단 나은겨. 이것저것 많이 해 봐~" 첫째의 얼굴은 그런 삶들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첫째는 각양각색의 인생의 순간에 맞서 즐겨 온 것이 분명했다. 젊을 때는 온갖 풍파에 흔들리고 방황하고 힘들었겠지만 이제는 정박한 배처럼 느긋함이 풍겨났다.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대처를 하느냐에 따라서 상반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각자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인생의 방향도 달라지는 것 아니던가! 고통도 즐거움도 땀도 눈물도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짐을 싣지 않은 배는 너무 가벼워서 항해를 할 때 이리저리 흔들린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내기 어렵다. 어느 정도 고난과 걱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인생을 항해하는 자, 모두에게 말이다.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어. 배우는 게 재밌고 신나. 커피 다 배우면 헤어커트 기술도 배울겨! 그다음? 또 배우고 싶은 게 있어. 배울 게 너무 많어. 나이 많다고 다 알아지는 게 아녀~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잖여?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해야 혀! 내가 지금 이렇게 나이 먹어도 마음은 이십대여~ 맘은 그대 론데 몸이 안 따라~ 그러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고 살아? 경험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께~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여!"
그렇다. 삶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다. 인생은 평생 공부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아주 짧은 것이 인생이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점점 시간이 빨리 흘러감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가장 부족하고 가장 아까운 것이 시간이다. 흘러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그녀들은 공감하고 있었다. 커피 공부가 생각보다 어렵다, 연습해도 잘 안된다, 쉽지 않다, 몸이 고되다고 말하는 5인방이지만 커피를 배웠던 이 시간이 그녀들의 인생 어느 한 때에 반드시 빛을 발할 순간으로 기쁨이 되어 찾아오리라 믿고 있었다.
배움으로 보낸 시간은 낭비되는 법이 없다. 반드시 보탬이 되는 인생의 과정이다. 인생에서 성공을 맛보는 순간은 노력의 마지막 그 순간이다. 간절히 원하는 만큼 충실히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노력해도 안 되는 일도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한 고비를 넘기면 무엇이 또 기다리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도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놀라운 결과를 맞이할 테니까!
커피 학도 5인방은 마냥 운이 좋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통도 슬픔도 모든 방황도 기꺼이 감내하며 살고 있다. 또다시 살아볼 만한 내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후회 없이 살아내고자 노력한다. 오늘이라는 순간을 견디고 이겨내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존재들이다. 울고 웃는 인생에 균형을 맞추어 살아갈 수 있게 온 마음을 다하여 힘이 되어 준다. 진심과 용기 있는 행동만이 자신이 꿈꾸는 인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확신하고 있다. 서로가 노력하며 성장하고 변화하는 시간을 응원하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며 온전히 알아가고 있다. 서로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다. 커피를 배우는 과정이 끝나더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함께하자며 약속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문득 외롭거나 쓸쓸할 때 서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이 차오르고 살아갈 힘과 위로가 되어 줄 인연들이다. 뭐니 뭐니 해도 5인방에게 커피를 닮은 이처럼 향기롭고 따뜻한 존재들은 없을 것이다.
쓸쓸한 가을에 만난 그녀들이 냉혹한 겨울이 끝나도록 몸보다 마음이 먼저 추워질 리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