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하면 산업화, 정밀기계, 축구, 히틀러와 세계대전, 철학과 같이 딱딱하고 전투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독일에서 가본 곳이라곤 '라인강의 기적'의 중심이 되는 뒤셀도르프와 쾰른 정도여서인지 역사와 건축, 문학과 자연 같은 이미지와는 잘 연관되지 않는다. 그런데 독일을 잘 아는 분이 남부 독일을 가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극구 권유를 해서 이번 독일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코로나 이후 실로 오랜만에 하는 장거리 여행이다. 12시나 돼서 출발인데 공항 가는 시간, 수속하는 시간을 다 따지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한다. 해외여행은 공항을 오가고 수속하는데 진이 다 빠진다. 특히 이코노미 라인에서 수속하는 건 대기 시간도 길어 더 힘이 든다. 그래서 매번 마일리지로 승급해서 갈건 지 마일리지 여행을 한 번 더 할 건지로 고민도 하게 된다.
수속을 마치고 탑승해서 좌석에 앉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결국 잠이 들고 이륙하는 걸 제대로 보질 못한다. 이왕 자는 거 눈 떴을 때 목적지면 좋으련만 쪽잠만 자고 저절로 눈이 떠진다. 자다 깨다 영화를 몇 편 봤는데 아직 반도 못 왔다. 힘들고 지친다. 점점 몸이 꼬인다. 그래도 여행의 즐거움은 기대된다.
도착 첫날,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출발해 뷔르츠부르크에서 퓌센까지 350km, 로맨틱 가도 상에 있는 로텐부르크에 도착한다. 낭만을 생각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진다. 다음날 새벽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지고 이곳이 궁금해진다. 대충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햇볕이 들어 방안엔 열기가 올라오는데 밖은 쌀쌀하기까지 하다. 단정하게 깔아놓은 석조 보도, 화려하진 않지만 짜임새 있게 이어진 작은 건물들이 소박한 예술품 같다. 로텐부르크는 한때 소금 무역으로 번성했고 17세기 독일의 30년 전쟁에도 견뎌낸 고성이라고 한다. 점령군과 술내기에서 이긴 성주 덕분이라나. 술은 잘하고 볼 일이다. 성문 밖 포인트에서 바라본 로텐부르크 성은 절벽 위에 세워져 제법 위품이 있어 보이고 멀리 보이는 성곽과 첨탑도 성으로서의 면모를 끌어올린다. 처음 보는 광경이 앞으로의 여정을 기대하게 한다.
이틀 날, 로맨틱 가도를 따라 킴제로 향한다. 킴제까지 지루한 버스 여정이 끝날 무렵 평지가 언덕길로 언덕길이 산길로 변해가고, 멀리 보이는 높은 산 사이로 간간이 설산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내 호수가 보이고 요트가 보이는 걸 보니 헬렌 킴제 성이 가까워 오나 보다.
늦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헬렌 킴제 성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배를 탄다. 오후 6시인데도 위도가 높아선지 대낮 같고 햇볕은 뜨겁다. 이 성은 루트비히 2세가 재정을 파탄 내가면서까지 지은 베르사유를 닮은 궁전이란다. 건축 당시 많은 원성을 샀지만 지금은 관광명소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 같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다.
성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가 7시라 궁전 정원을 빠른 걸음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궁으로 오가는 숲길에는 모기들이 들끓어 마치 클레이모어로 사격을 해대는 것 같다. 모기의 공격을 피하느라 온몸을 흔들어댄다.
궁전 정원의 규모는 작아도 호수를 끼고 있어서 베르사유 정원 못지않게 넓어 보이고, 호수에 비친 노을은 궁전 정원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든다. 아쉽게도 주말 늦은 시각이라 화려하다는 궁전 내부는 돌아보지 못하고 루트비히 2세의 사치스러움도 느껴보지 못한다.
삼일 째, 독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이 호헨촐레른 성이다. 1701년 프로이센왕국 탄생시키고, 1871년에는 독일제국의 황제를 탄생시킨 곳이다. 또 이 성은 독일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요새화된 성이란다. 성 안에는 왕관, 칼, 보석 같은 왕실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교회도 있고 성당까지 있는 걸 보니 신구의 화합점을 찾았나 보다. 그런데 군대가 머물 곳은 어딘지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성 밖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적이 쳐들어오면 군대가 되는 모양이다. 성당 안에서 여인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여온다. 노랫소리가 성당 건물에 울려 퍼져 성스럽기도 하고 성당 분위기와 잘 어울려 마치 중세 시대에 와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기 전에 하이델베르크 성을 돌아보기로 한다. 하이델베르크를 가로지르는 네카어 강 다리에서 보는 하이델베르크 성은 산 위에 왕관을 씌워 놓은 것 같다. 성 안에선 무대를 설치하느라 분주하다. 휴가 때가 돼서인지 공연이 많아지나 보다. 공연을 보면서 맥주 한 잔은 여정을 마무리하는 방점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성은 독일 30년 전쟁의 상처가 있는 곳이다. 성 한구석은 거의 무너져 간다. 신기한 것은 건물 내부에 커다란 오크통이 있는데 어마어마하다. 하루 13갤런씩 12년을 먹는 양을 담을 수 있단다. 독일인들의 맥주 사랑을 짐작하게 한다.
세기의 철학자 칸트와 괴테가 나온 하이델베르크 대학도 이곳에서 멀지 않아 둘러보기로 한다. 건물들 사이에 섞여 있어서 대학 팻말을 못 봤다면 어디가 대학인지 알아볼 수 없을 뻔했다. 한 건물에서는 문학 페스티벌을 하는지 포스터가 붙어있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다른 건물에선 십여 명의 사람들이 합창 연습을 하는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옆에 성당이 있어 들어가 본다. 규모도 크고, 고딕식에 천장도 높다. 아내는 여지없이 초를 사고 피에타 상 앞에서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한다. 짧지만 무사히 마쳐가는 여행에 감사도 하면서
여행 은 늘 기대 이상이다. 특히 이번 독일 여행은 딱딱하고 정확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독일에서 중세가 잘 보존된 소도시의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발견한 것은 놀라움이었다. 城과 광장을 중심으로 발달된 중세풍의 작은 古都마다 역사와 스토리가 있고 광장 안 카페에는 여유로움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많은 즐거움이 있었다.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 이곳에 들러 더 오래 더 자세히 독일의 속살을 볼 기회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