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119를 구조하라
<1>
“가위바위보! 보! 보!”
족구장 복판에 마주 선 강상우와 변종수가 계속 주먹만 내니까 편 나누기가 꽤 심각해 보인다. 언제나 편 나누기가 이렇게 치열한 것은 군대에서 사단 대표까지 했다는 김장호를 서로 욕심내기 때문이다. 확실히 김장호는 순발력과 유연성이 좋고 힘까지 강력했다. 스핀킥으로 서비스 포인트도 많이 올리는 김장호를 차지하는 팀이 이기는 것은 거의 공식에 가깝다.
김장호를 차지한 강상우 팀은 1세트에서 15대 8로 이겼고, 지금 2세트도 11대 6으로 앞서고 있다. 이제 4점만 더 따면 세트 스코어 2대 0으로 끝난다. 어제는 변종수 팀이 김장호의 활약으로 짜장면을 따먹었지만, 오늘은 강상우 팀이 짬뽕을 그저 먹을 판이다.
그런데 강하게 공격하던 김장호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픽 쓰러졌다.
“악!”
“어, 김장호! 왜 그래?”
강상우가 놀라서 외쳤다.
“으으, 주임님. 발목을… 접질렸어요.”
“에이, 조심하잖고…….”
강상우가 중얼거리며 김장호에게 갔다.
“허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사단 대표도 족구 하다가 다치네.”
변종수는 네트 넘어 김장호에게 가면서 걱정인지 안심인지 모호하게 말했다. 강상우가 손으로는 김장호의 발목을 만지면서 눈으로는 변종수를 마뜩잖게 노려보았다. 동료들이 김장호를 사무실로 옮기는 걸 보고 강상우가 말했다.
“어이, 변종수. 오늘은 그만하자. 짬뽕은 각자 먹고…….”
“무슨 소리야? 계속해야지. 싸나이가 칼을 뺐으면 끝장을 봐야지.”
변종수는 김장호가 빠진 강상우 팀이 만만하니까 계속하자고 우겼다. 이러니 저러니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김장호 없이 게임을 진행했다.
조금 전까지 11대 6으로 지고 있던 변종수 팀이 12대 15로 2세트를 역전승했다. 김장호가 없는 족구장은 변종수의 독무대였다. 세트 스코어 1대 1에서 3세트는 13대 8로 완승의 문턱이 보였다. 이제 2점만 더 따면 끝이다.
바로 그때 비상이 걸렸다. 모두 장비를 챙겨서 출동했다. 소방차에 올라탄 변종수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서도 크게 말했다.
“어이, 강상우! 불 끄고 와서 다시 붙자.”
“뭐라고? 안 들려!”
강상우는 변종수의 말뜻을 알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다시 붙자고, 나중에!”
“아, 모르겠어. 일부터 해.”
변종수는 김장호가 빠졌을 때 이기고 싶었지만, 강상우는 반대 입장이니까 계속 딴청을 부렸다.
화재 현장은 소방서에서 2Km 떨어진 아파트 상가인데 별로 큰 불이 아니고 출동도 빨라서 쉽게 진화 작업을 마쳤다. 분식점 주방에서 발화된 작은 사고였지만 그을음을 덮어썼기에 샤워는 해야 한다.
“어이, 변종수. 고참이 먼저 씻을게.”
강상우는 6개월 선임인 것을 내세우면서 샤워장에 들어가려 했다.
“씻긴 뭘 씻어. 족구 끝내고 씻어야지.”
변종수는 이 빠진 호랑이 같은 강상우 팀을 빨리 꺾고 싶어서 공을 챙겨 들고 족구장으로 향했다. 더 피할 명분이 없어진 강상우가 협상안을 냈다.
“좋아, 그럼 마지막 세트만 0대 0에서 다시 시작하자.”
“미쳤어? 13대 8에서 멈췄으니 거기서 연결해야지. 티뷔 이어 보기도 안 봤어?”
변종수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2점만 더 따면 끝인데 왜 아깝지 않을까.
“출동했다가 다시 하니까 새로 시작해야지.”
“그런 법이 어딨어? 이 사기꾼아.”
“법은 고참이 정하는 거야. 싫으면 말고.”
강상우는 배짱을 부리고 후임자들은 두 사람의 입씨름만 구경했다. 잔뜩 열받은 변종수가 비장의 무기를 들었다.
“야, 그럼 세트 스코어도 0대 0에서 완전 다시 하자.”
“세 세트 모두 다시?”
“그래.”
변종수는 고등학교 동기면서도 소방서 고참이라고 갑질하는 강상우를 지금 확실히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 끌수록 불리한 것을 뻔히 아는 강상우가 동의할 리 없었다.
“안 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실랑이가 길어지자 후배들이 중재하여 마지막 세트만 0대 0에서 다시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범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한다고, 김장호 빠진 이후부터는 변종수가 군계일학이었다. 변종수 팀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여서 9대 2까지 올라갔다.
이때 황수미가 웃으며 족구장으로 다가왔다. 손에 밀감 봉지를 들고 온 황수미는 강상우의 여자 친구이며 여중학교 음악 교사이다.
강상우에게 공격 찬스가 왔을 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강상우는 황수미가 보는 앞에서 멋진 발리킥을 날렸다. 그런데 그 공이 변종수를 지나서 황수미의 이마에 맞은 것이다. 황수미가 떨어뜨린 검정 비닐봉지에서는 밀감이 쏟아졌고, 황수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강상우는 씩씩거리며 뛰어가서 변종수의 멱살을 잡았다. 가뜩이나 게임도 안 풀려서 속이 끓던 중이었다.
“야, 인마! 뜬 공은 잡아야지 그냥 날리니까 사람이 맞잖아!”
“어, 상우야.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인마, 나한테 무슨 감정 있어?”
“아니, 그게… 난 사실 뒤에 수미 씨 있는 것도 몰랐어.”
사실이 그랬다. 게임에 몰두하던 변종수는 자신의 뒤에 누가 왔는지 몰랐다. 게다가 렐리 중인 공을 손으로 잡으면 실점이 되니까 변종수의 행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후배들이 말려서 큰 충돌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하지만 황수미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종수씨.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뭘.”
“아이고, 정말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악당이 되어버렸네요.”
조금 분위기가 바뀌자 강상우도 낯빛을 풀고 말했다.
“자, 오늘은 우리가 졌어. 우리가 짬뽕 살게.”
“아니, 상우야. 어제도 네가 샀으니 오늘은 내가 살게,”
이젠 점심값을 서로 내겠다고 아웅다웅하다가 일단 단골집에 주문부터 했다. 대원들은 우르르 샤워장에 가서 고양이 세수만 마치고 나왔다. 그들은 밀감을 까먹으며 짬뽕을 기다렸다.
저쪽에서 배달 청년의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순간에 또 비상이 걸렸다.
“오늘은 낮에만 두 탕이네.”
강상우의 말에 변종수가 거들었다.
“그러네. 족구도 두 판이나 하고…….”
인근 야산에서 풀베기하던 중에 말벌이 나타났다는 신고였다. 변종수가 인솔하는 B조가 출동하고 강상우의 A조는 식사를 했다. 말벌 소탕에 모든 대원이 함께 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종수의 B조가 출동한 직후에 또 신고가 들어왔다. 12km 떨어진 이웃 농가의 축사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는 거였다. 그 면 소재지에도 소방서가 있지만 인력이 부족하여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강상우는 몇 젓가락 먹지도 못한 후배들과 출동을 서둘렀다.
이정민 과장은 최영섭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운전을 제일 잘하는 김장호가 한의원에 갔으니 어쩔 수 없다. 최영섭은 지난달에 김해에서 전입해 와서 관내 지리에는 어둡지만, 대형 화물차 운전 경력이 많아서 실력을 인정받는 편이었다.
잘 나가던 소방차가 마을 들머리에서 멈추었다. 도로 공사 때문에 별수 없이 차를 돌려야만 한다. 본부에서는 빨리 출동하지 않고 뭐 하느냐는 무전이 날아왔다. 마음이 조급해진 최영섭은 후진하다가 한쪽 바퀴를 논두렁 아래로 빠트리고 말았다. 그 부근에는 객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논이 많아서 땅이 무른 편인데, 최영섭이 현장의 지리적 상황에 어두운 탓이다.
“이래서 관외 전입자는 안 되는 거야. 인사 발령 내는 작자들은 개코도 모르면서 대원 이동을 멋대로 시키지.”
강상우가 툴툴거리는 동안에도 무전은 계속 날아왔다. 이정민 과장은 무전기가 터져라 고함을 질러댔다.
“어이, 강상우! 자네 뭐 하고 있어?”
“네, 과장님. 차가 빠져서 래커를 불렀습니다.”
“뭐라? 지원 나가는 놈이 또 래커 지원을 받아야 해?”
“네, 그렇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들! 빨리빨리 좀 못해?”
무전기를 끈 강상우는 울화통이 터져서 불평을 했다.
“신입대원에게 운전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지기미!”
래커가 오고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40분이나 늦게 현장에 도착하니 진화 작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축사 옆 대형 창고의 사료용 볏짚은 마치 화약과도 같다. 골든 타임을 놓치면 순식간에 타버린다. 축사 주인은 강상우의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부었다.
“야, 이놈아! 축사 다 태우고 지금 오면 뭐 해? 멀쩡한 소가 다섯 마리나 죽었다고!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눈이 뒤집힌 축사 주인은 모든 책임이 강상우에게 있기나 한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 이미 그에게서는 술 냄새도 확 풍겼다.
면 직원들과 파출소 경찰관들이 겨우 뜯어말렸지만, 강상우는 황당했다.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고 놀다가 온 것도 아니다. 최대한 서둘러 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이러니 어쩌겠는가. 축사 주인의 패악질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면 소재지에 있는 자체 소방서는 노후 차량이고 호스의 수압까지 약해서 진화 작업도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출동을 빨리했으니 멱살까지 잡히지는 않았다.
소방서에 돌아온 강상우에게 이정민 과장의 짜증 섞인 닦달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 강상우. 너 좀 똑바로 못 해?”
“…….”
“무슨 일을 어떻게 하기에 출동이 늦어서 말이야. 골든타임을 다 놓치고 말이야. 평소에 대비를 잘해야지. 아이고, 나참!”
“저, 과장님. 최영섭이 아직 관내 도로 상황을 잘 몰라서…….”
“글쎄, 전입 대원 교육을 평소에 잘해야지, 매일 족구나 하고 말이야.”
언제는 대기 시간에 헐렁헐렁 시간 때우지 말고 헬스나 족구로 체력을 단련하라더니.
강상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대들지는 못했다. 계급 사회에서는 직속상관이나 부하들과의 다툼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어이, 강상우. 내가 소주 한잔 살게. 잠깐만 기다려.”
변종수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강상우를 불렀다. 그들은 아직 점심도 못 먹은 탓에 몹시 시장했다.
<2>
두 사람은 단골집에 가서 마주 앉았다. 삼겹살이 채 익기도 전에 연거푸 소주 두 잔을 마신 강상우가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내가 뭐 늦고 싶어서 늦었냐고. 나도 콩이 튀게 서둘렀어! 그런데 길이 막히고 차가 빠진 걸 어떡해? 과장은 쥐뿔도 모르면서 고함만 지르면 다야?”
“야, 야. 참아. 술맛 떨어져. 이런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변종수가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를 밀어주면서 달랬지만, 강상우의 불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솔직히 소방서 운영에 문제가 많다구. 현장 인력이 늘 부족하잖아? 교통사고, 화재사고, 말벌 잡기에 심지어 아파트 열쇠도 열어줘야 하잖아? 아니, 우리가 슈퍼맨이야? 이거 원…….”
“그래서 자랑스러운 119잖아. 정의의 사도 119, 하하하!”
변종수는 늘 낙천적이라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손이 모자라는 건 제도를 보완해야지, 고함질러서 해결돼? 당장 출동할 인력이 모자라는데 내근 직원들은 서른 명이나 사무실에서 뭉기적거리잖아. 그 인간들은 전화받고 공문 처리하면서 퇴근 시간이나 기다리고 말이야. 현장에서 우리는 손이 모자라서 죽을 판인데… 지기미!”
강상우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 불평을 계속 쏟아냈다.
“그건 그래. 땀 흘리며 설치다가도 그 인간들 생각하면 기분 더럽지.”
변종수가 맞장구를 치니까 강상우의 불만은 꼬리가 더 길어졌다.
“그리고 내근 직원들이 공문서 처리와 행정 업무를 다 하면 되지, 왜 우리에게 행정 업무를 맡기냐고. 비닐하우스에 상가 건물까지… 화재 예방 지도와 단속도 우리가 죄다 하잖아.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데… 우리는 준비하고 대기해야 하는데 허구한 날 공문서 쪼가리나 만지작거리니까… 이거 참, 우리가 동네북이야 뭐야?”
“그나마 요즘 장비는 좋아졌잖아?”
“좋기는 개뿔! 늙은 차에 빨간 칠만 새로 하면 새 차 되나? 수압도 약하고 말이야. 예산 없다고 하지만 헬기도 좀 더 늘려야 하잖아? 당장 대형 사고에는 크레인도 부족하고… 개인 장비만 조금 나아졌지 큰 장비들은 아직 한참 멀었어.”
“그거야 우리가 술집에서 용쓴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니잖아?”
변종수가 답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갑갑하다는 거지.”
“갑갑해도 참아. 지금은 술이나 마시자고.”
변종수가 내미는 빈 잔을 받으며 강상우가 불쑥 말했다.
“이게 모두 노조가 없어서 그래. 전공노가 열심히 활동하는데, 왜 우리만 노조가 없냐고. 그러니까 우리 권익을 지켜줄 누군가가 없는 게 문제야.”
“없기는 왜 없어? 우리 권익은 국민이 지켜주잖아? 119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 국가 기관 중에서 신뢰감 1등이 우리야.”
띠리링 띠리링.
한참 열 올리는 중에 황수미의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인데 함께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그러나 강상우는 지금 기분으로는 황수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술도 몇 잔 마셨으니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가고 내일 보자고 했다.
강상우는 변종수에게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나, 결혼도… 다시 생각해야겠어.”
“왜? 너랑 수미 씨는 멋진 커플인데…….”
변종수가 의아한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은 별문제가 없어. 네 말마따나 멋진 커플이지.”
“그럼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수미 씨 아빠의 반대가 심해.”
“그래? 너만 한 사윗감 흔치 않은데… 뭐가 불만이래?”
“그 양반, 자기 딸은 1등 신붓감인데 소방대원은 위험해서 안 된대.”
강상우가 툭 던지듯이 말하면서 반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2년 동안 황수미와 사귀던 강상우는 미래의 장인에게 인사하러 갔었다.
“어르신, 인사드리겠습니다. 강상우라 합니다.”
“강상우? 그래, 뭐 하는 사람인가?”
황태규는 고압적이고 거만한 눈으로 강상우를 아래로 주욱 훑어봤다.
“네, 밀양소방서에 근무하는 119 대원…….”
“잠깐, 119도 공무원인가?”
황태규는 성격이 급해서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잘 자른다.
“네, 그렇습니다. 저희도 엄연한 공무원이고…….”
“아니, 그게 시청이나 세무서 같은 공무원은 아니지? 또 그거 아주 위험한 직업이잖아?”
“아빠, 좀 그만해요.”
황수미가 눈을 흘기며 끼어들었고 강상우는 할 말을 못 찾아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네 부친은 뭐 하시는가?”
“네, 퇴직하시고 집에 쉬고 계십…….”
“쉰다고? 연세는 얼마나 되셨나?”
“예순다섯인데 건강하십니다.”
강상우는 ‘당신보다 훨씬 건강합니다.’ 라는 말을 속으로만 했다.
“나보다 한 살 적구먼. 그런데 그 나이에 벌써 놀고 있다고?”
“아빠, 제발 좀…….”
황수미가 끼어들었지만 분위기를 돌리지는 못했다. 강상우는 기분이 슬슬 상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 취직시험 면접도 아니고 범인 신문도 아닌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그야말로 첫인사를 드리러 온 것인데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다.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노는 게 아니고 퇴직 후에 잠시 쉬고 계시는 중…….”
“그게 그거지, 뭐.”
“…….”
“그래, 퇴직하시기 전에는 어디에서 일하셨고?”
“네, 밀양소방서에서 정년퇴직하시고…….”
“가만, 그럼 부친도 소방공무원이었나?”
“네, 그렇습…….”
“쯧쯧, 그러니까 집안이 중요한 거야. 불 끄는 아버지에 불 끄는 아들이니… 자네 생각에는 우리 수미와 맞을 거 같나?”
강상우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으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어르신, 물론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다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세종대왕만큼이나 존경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불 끄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소방대원의 꿈을 키웠습니다. 지금은 연금으로 생활하시면서 이웃에 봉사도 하시는 자랑스러운 분입니다.”
이번에는 강상우가 말을 상당히 빠르게 해서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런 말이라도 해야만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처럼 힘 있게 말했다.
“그래서? 요점이 뭔가?”
“저는 돈이나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몰상식한 구시대적 발상…….”
“잠깐! 자네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는가? 감히… 이런 건방진… 당장 나가!”
황태규는 목 언저리까지 붉히면서 소리 질렀다. 그때 황수미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아빠! 아빤 돈밖에 없죠? 가족의 사랑도 없고 이웃에 봉사도 안 하죠? 하지만 상우 씨 아버지는 돈만 빼고는 아빠보다 더 많은 걸 가졌어요. 그분은 가족의 사랑과 이웃에 봉사도 실천하시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도 있어요. 건강은 아빠보다 훨씬 좋아요. 저는 아빠보다 그분의 인생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
“그만둬. 너까지 왜 그래? 남자들 이야기에 끼어들지 말고 넌 빠져.”
“남자들 이야기라고요? 이 일은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됐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강군 자네는 다음에 다시 만나세. 혹시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네.”
황태규는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강상우와 황수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허공을 쳐다볼 뿐이었다.
황태규는 지역 내에서 여론이 상당히 나쁜 사람이다. 국회의원과 공무원에게 뇌물과 향응을 제공하면서 아부하는 일에 천재적이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 수법으로 고급 정보를 얻고 부동산 개발과 투기로 돈을 모은 졸부였다.
황태규는 여당 국회의원 염상정에게 정치 후원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다. 처음엔 그가 지역구 부위원장을 맡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불협화음이 심해서 그만두었다. 대신에 개인적으로 염상정에게 접근하면서 항상 밑밥을 뿌렸다. 염상정 역시 공식적인 후원금보다 개인적인 관계를 더 좋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규는 염상정의 아들에게도 욕심을 갖고 있었다. 김해 세무서 7급 공무원인 염병재를 사윗감으로 탐내고 있었다. 만약 국회의원과 사돈이 되고 세무 공무원의 장인이 된다면 자신은 독수리의 날갯짓처럼 멋지게 비상할 것이라 믿었다.
지금까지 딸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못 하고 기회만 노리는 것은 염병재가 이혼남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딸린 아이가 없는 데다 신혼 때 일찍 이혼했으니 총각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황태규는 요즘 세월에 그 정도는 흠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태규가 이제나저제나 말할 기회만 벼르고 있던 중에 강상우라는 젊은이가 불쑥 나타났으니 달갑지 않은 것이다. 물론 30년 이상을 딸 하나만 바라보면서 살아왔으니 질투심 비슷한 감정도 없진 않았다. 또 가정 배경이나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는 데다 말대꾸나 또박또박하니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황태규는 딸이 두 살 때 아내를 잃었다. 아내는 폐결핵 진단을 받은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황수미의 큰외삼촌과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가난한 그는 큰처남이 병원비를 안 빌려줘서 아내를 잃었다고 원망했다. 그것을 자기 합리화의 명분으로 삼아서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부동산 투기는 기본이고 고리대금업까지 손댔다.
약하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관용이나 배려의 미덕은 손톱만큼도 없다. 자선 단체 같은 데서 기부금이라도 부탁하면 십 리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이다. 지금 그에겐 날마다 불어나는 재산의 기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돈 냄새를 맡으면서 충성하는 공영표 비서가 그림자처럼 곁에 있다. 공영표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고 욕심이 많지만, 부지런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월급에 불만이 많아도 7년 동안이나 운전과 경리 업무까지 겸하고 있다. 물론 한약 파우치 데우는 일과 커피 타는 것까지 자잘한 일도 매일 하고 있다.
조그만 조폭의 행동대장 출신인 백두철은 황태규가 부르면 즉시 나타나는 개인 경호원이며 심부름꾼이다. 불러서 30초를 넘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냥개처럼 민첩한 수족이다.
황태규는 부동산 임대업도 탐욕스럽게 넓혔다. 목이 좋은 상가에 점포를 여러 개 갖고 임대료도 최고 수준으로 받는다. 월세가 하루만 늦어져도 당장 공영표를 보내고, 이틀 늦어지면 백두철을 보낸다. 그러면 백 프로 해결이 된다.
이 방법은 사채를 빌려 쓰는 채무자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항간에는 ‘하나님 돈은 떼먹어도 황태규 돈은 갚아야 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건물 지하에서 성업 중이던 궁전 나이트클럽도 악랄한 수법으로 인수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재계약이나 권리금도 없이 세입자 남경수를 내쫓았다. 백두철의 부하들이 계약 만료 두어 달 전에 기물을 파손하면서 남경수를 겁박한 결과였다.
빼앗다시피 한 궁전 나이트클럽을 조금 개조하여 황제 나이트클럽으로 바꾸고, 공영표 이름으로 사업자 신고를 했다. 이런 식으로 탐욕의 주머니를 키우니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질을 했다.
좁은 소도시의 소문은 금방 퍼지는 법이다. 황태규에 대한 혹평은 여러 사람의 입질에 오르내렸다. 몇 년 전에는 여비서를 임신시켰는데, 그녀가 혼인 신고와 호적 입적을 요구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황태규는 일단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라고 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여비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 세상인데 특히 황태규처럼 인심을 잃은 사람에게는 더 심한 법이다.
<3>
변종수와 헤어진 강상우가 집에 들어가니 마침 강용준이 검정 양복 차림으로 대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어, 아버지. 어디 가세요?”
“아, 상우 왔어? 나 지금… 후배 모친상… 장례식장에 좀 다녀오마.”
“그러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말고…….”
“알았어, 이 녀석아. 어째 네 엄마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해?”
강용준은 말이야 그렇게 해도,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아들이 태산처럼 든든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소방관이 되어 준 것도 늘 자랑스러웠다.
병원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꽤 많았다. 빈소에 예를 올리고 나오니 제일 안쪽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맏상제가 강용준의 소방서 후배이고, 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소방 동우회 선후배들이다.
“아이고, 조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강용준은 좌장인 조정길에게 가서 넙죽 고개를 숙였다. 올해 일흔다섯인 조정길은 소방 동우회에서도 전설적인 인물이다. 비교적 말수가 적은 그도 과거의 활약을 이야기할 때만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오늘처럼 이렇게 후배들과 만나면 현역시절의 무용담을 무슨 훈장처럼 펼쳐 보인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지, 1971년 크리스마스 때야. 그날 대연각 호텔에 큰 불이 났지. 20층 호텔에 대형 화재가 났는데 말이지, 요즘처럼 장비가 좋았던 게 아니야. 열악한 장비였지만 우리는 살신성인의 정신력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지. 나는 아홉 명이나 차례로 부축하여 구했어. 그 화재사건 이후에 미국에서는 ‘타워링’이라는 재난 영화를 제작했지. 정말 대단했어.”
후배들은 벌써 몇 번씩이나 들었던 말이지만 대선배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진화작업으로 정신없이 뛰다가 박정희 대통령을 보았어. 그 추운 새벽에 화재 현장으로 직접 나와서 속을 태우며 안타까워하던 그분을 보았어. 길거리에서 김현옥 내무부 장관의 보고를 받는 동안에도 그분은 현장에서 뛰는 우리들의 움직임을 계속 지켜보았어. 나는 그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그런 상황에서 어떤 대원이 몸을 사리겠어?”
조정길이 옛 생각을 더듬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맞습니다, 선배님.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잊지 못하고 존경하는 겁니다. 그 후에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천안함 폭침까지 국가적인 재난이 많았지요. 하지만 그 위급한 재난 현장에 다른 대통령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강용준의 말에 노명일이 불쑥 나섰다. 술이 약간 취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선배님, 그런데 그분의 따님은 왜 세월호 현장에 가지 않고 청와대에서 보고만 받고 있었습니까?”
“…….”
순간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그건 말이야, 사고 직후 TV에서 전원 구조가 가능하다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잖아?”
강용준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그래도 그분의 따님이라면 현장에 빨리 갔어야지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조정길이 테이블을 탁탁 친 후에 말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진도 체육관에 갔을 때 안하무인으로 무례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봐.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건 핑곕니다. 어쨌든 그 사고에는 컨트롤 타워가 무능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역할에 대한 비판이 가장 우선입니다. 상부에 보고하기 이전에 선장과 선원들이 소임을 다 하는 게 제일 먼저입니다. 그런 다음에 해경이 투입되어서…….”
노명일의 말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맞아. 해경이 멍청했고 해수부 공무원들이 무능했어.”
“유병언의 탐욕이 불행의 출발점이야.”
“유병언에게 돈 받아먹은 놈들도 전부 공범이야. 다 잡아야 해.”
소주를 한 잔 더 마신 노명일이 물었다.
“강 선배님, 그런데 왜 세월호 현장에는 우리 119가 없었습니까? 승용차 한 대가 처박혀도 우리 대원들이 출동하는데, 그 큰 사고에는 왜 119가 없었냐, 이게 문젭니다.”
“그건 말이야, 해경에서 119 투입을 반대했다더구먼.”
“왜요?”
“글쎄… 해경, 해피아, 세월호 본사, 그놈들이 뭐가 켕기니까 그랬겠지, 뭐.”
“저런, 쳐 죽일 놈들! 재난 구조에는 우리 대원들이 챔피언인데, 제 놈들 비리 때문에 사태를 그렇게 만들다니…….”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시중에 나돌고 있는 뒷이야기들이 여기에서도 장마철의 잡초처럼 무성했다.
<4>
관내의 다중 이용 건물에 소방 점검을 하는 날이다. 김장호는 신입 대원 오성식을 대동하여 여러 건물을 다니다가 오후 늦게 황제 클럽에 들어갔다. 이 나이트클럽은 소도시 지역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넓고 인테리어도 화려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 문제점이 몇 건 있었다.
우선 스프링클러의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면적에 비해서 소화기의 개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조명기구들이 많은데 전선은 약해 보였다. 또 비상구 입구에 술 상자가 잔뜩 쌓여있어서 비상시에는 대피로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김장호는 확인서를 정확하게 작성하여 지배인에게 서명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마침 클럽에 들어오던 공영표가 가로막았다. 공영표는 거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소방관 나리.”
“네, 소방 시설에 문제가 있어서 몇 가지 확인을 좀 받으…….”
말이 덜 끝났는데 공영표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김장호를 사무실로 불렀다. 사무실에 두 사람이 들어간 지 3분도 안 되어서 김장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왔다. 김장호는 그 안에서 점검 확인서에 ‘이상 없음’이나 ‘양호함’으로 모두 기록했다. 물론 돈 봉투를 깊이 감추고 공영표의 확인 서명도 받았다.
그런데 오성식이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오성식은 강상우에게 조용히 보고했다. 주위를 힐끗거리는 것이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저, 주임님. 김장호 부장이 황제 클럽에서… 확인서를 다시 작성했는데, 좀 이상해요.”
“뭐? 확인서를 다시 작성해?”
“네. 그쪽 사람과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하여간 좀 이상해요.”
“그래, 알았어.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강상우는 김장호를 따로 불러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봐, 김 부장. 너 황제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뇨? …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 왜요?”
강상우는 아뿔싸 싶었다. 김장호는 이렇게 우물우물 말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지금은 몹시 당황하고 있다. 본래 정직한 사람이 어쩌다 거짓말을 하면 이렇게 티가 나는 법이다.
“야, 김장호! 너 황제에서 돈 받았지?”
강상우는 둘러치지 않고 정곡을 바로 찔렀다. 김장호를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주임님. 그게 … 저, 우리 조원들… 회식비라도 하려고…….”
김장호는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너 미쳤어? 옷 벗고 싶어?”
“주임님, 그게… 저…….”
겨우 말을 이어나가는 김장호의 사정은 딱했다. 모친이 희귀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험 적용이 안 되니까 병원비는 감당키 어려웠고, 전셋집도 사글세로 낮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투병 기간이 길어지니까 비싼 사채까지 쓸 형편이라 했다.
“그런 사정을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
강상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꾸었으나 김장호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그냥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릴 뿐이다.
“하여간 병원비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그 봉투는 당장 돌려주고 와.”
“저, 주임님. 건물 지배인이 즉시 보완하겠다고 했으니, 한 번만 눈감아주시면…….”
“안 돼. 그따위 봉투 받고 옷 벗을래? 내가 모른 척해도 오성식이가 알잖아.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
“주임님,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있다가 이야기하고, 일단 봉투부터… 아니, 내가 함께 가는 게 좋겠어.”
강상우는 김장호와 함께 확인서를 다시 작성하여 밖으로 나갔다. 걸어가도 가까운 거리지만 승용차를 타고 일부러 빙 둘러서 황제 클럽에 갔다.
마침 입구 쪽으로 나오던 공영표와 딱 마주쳤다. 김장호가 봉투를 되돌려주면서 어물어물 말했다.
“저… 이 봉투… 안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 왜 그래? 돈이 적어서 그래? 에이, 우리도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공영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한쪽 입술만 위로 살짝 올라가는 느끼한 웃음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희 주임님이…….”
“오호, 주임이라고? 이 친구도 좀 줘야 한다고?”
공영표는 강상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강상우는 김장호의 손에서 봉투를 뺏어 공영표의 양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 돈은 소방 시설 보완에 보태 쓰십시오, 그리고 여기 확인서에 다시 서명하십시오.”
“아, 아니.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요? 이 건물 주인이 누군지…….”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저희는 지금 공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물론 강상우도 이 건물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황수미의 얼굴도 잠깐 떠올랐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공영표가 갑자기 꼬리를 내리면서 강상우의 손을 잡고 사무실로 끌었다. 강상우는 공영표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확인서만 내밀었다. 이러니 저러니 입씨름이 조금 벌어졌으나 결국 공영표는 확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강상우의 등 뒤에다 대고 공영표가 크게 말했다.
“야, 요즘 돈 안 먹는 공무원도 있냐?”
걸음을 멈춘 강상우는 공영표에게 되돌아가서 말했다.
“그래. 이런 공무원이 더 많아. 그러니까 조심해!”
낮으나 단호한 음성이었다.
오성식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방금 돌아온 강상우와 김장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온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 왜 저러지? 강 주임이 김 부장을 혼내지 않고……. 두 사람이 어디에 다녀왔지?’
오성식은 엉뚱한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혹시 두 사람이 돈을 나누었을까? 그럴지도 몰라. 굳이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간 것은 내 눈을 피하고자……. 그럼, 내 몫은 없나? …이런 빌어먹을!’
일단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의심이 깊어졌다. 자기 혼자만 바보가 된 느낌이다. 배신감도 느꼈지만,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는 낭패감도 생겼다.
‘그래, 과장님께 보고해 버리자. 이 일은 우리 119의 명예와 청렴성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어.’
생각을 굳힌 오성식은 과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과장실 앞을 그냥 지나쳤다.
‘아니야. 내가 과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돼.’
오성식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핸드폰을 꺼냈다.
“과장님, 저 오성식입니다.”
“어, 오성식? 자네 근무 시간에 무슨 전화를… 어디야, 거기?”
“네, 잠깐 밖에 좀 나왔습니다.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사무실은 좀 그렇고…….”
오성식은 방금 올라온 계단 쪽을 자꾸 돌아보면서 말을 시원하게 못 했다.
“뭔데 그래? 전화했으면 편하게 말해봐.”
“저, 과장님. 이건 과장님께만 말씀드리는 비밀인데요. ……강 주임님과 김장호 부장이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
“괜찮아. 자네가 말한 것은 비밀로 할 테니까 이야기해 봐.”
이정민은 최고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성식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처음에 떨리던 목소리도 차츰 자신감 있게 바뀌었다.
“그래, 알았어. 자넨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전화를 끊는 이정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비쳤다.
‘됐어! 뇌물 봉투를 두 놈이 나누었다고? 이제 저 건방진 강상우를 구석진 자리로 쫓아버리자. 김장호는 아예 옷을 벗길까?’
이정민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면서 생각을 굳혔다.
‘좋아. 곧 인사이동이 있을 테니 그 직전에 터뜨리자. 증인은 오성식이 있으니까.’
이정민은 오성식의 입장이나 비밀 약속 따위는 금세 잊어버렸다.
강상우는 이튿날 변종수와 의논했다. 봉투 문제는 말하지 않고 김장호가 무척 어렵다는 말을 했다. 강상우와 변종수는 다른 대원들에게도 개별적으로 부탁하여 성의껏 돈을 모았다.
밥 열 숟가락 모아서 한 그릇 만든다는 십시일반의 정성을 김장호에게 전했다.
“어이, 김 부장. 이거 받아.”
“아니, 주임님. … 이게 뭡니까?”
“어, 우리 팀에서 조금 모았는데 많지는 않아. 어머니 병원비 좀 보태라고.”
“주임님. 제가 이걸 어떻게 받습니까?”
김장호는 귓불까지 붉어졌다.
“어떻게 받긴?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되지.”
“그래도 제가 이걸…….”
“괜찮아. 병원비 보태 쓰고, 너도 나중에 어려운 동료들 도와주면 되잖아.”
강상우는 김장호의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이면서 씩 웃었다. 마치 막냇동생을 달래는 형님과 같았다. 김장호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보답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5>
11월 19일 소방의 날이다. 기관장들이 참석하고 소방 동우회 회원들과 현역 대원들이 모여서 기념식을 했다. 기념식 후에는 청백으로 나누어서 2부 행사를 펼쳤다. 족구대회, 팔씨름, 닭싸움 등의 체력 대결을 한바탕 치렀다. 마지막에는 노래자랑까지 재미있게 이어졌다.
강상우는 행사가 끝날 무렵에 황수미의 전화를 받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관에도 갔다. 그러나 행복한 데이트가 계속되는 중에 뒤에서 노려보는 눈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황수미를 집 앞까지 바래다준 강상우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약간 한적한 길로 나가니까 앞서가던 트럭이 멈추었다. 강상우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검은색 승합차가 강상우의 뒤에 바짝 댔다. 샌드위치 상태가 된 강상우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승합차에서 세 명의 사내가 내렸다. 그들은 모두 야구 방망이를 들고 강상우의 차로 접근했다. 그리고는 강상우에게 승합차로 옮겨 타라고 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이거 납치 아니오?”
“야, 입 닥쳐! 맞고 갈래? 조용히 갈래?”
으름장 놓는 서슬을 보니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승합차 안에 두 명이 더 있으니 사내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처음에 조금 저항하던 강상우는 허벅지에 방망이를 맞고 주저앉았다.
카스테레오에서 나오는 가요를 흥얼거리며 사내들이 강상우를 끌고 간 곳은 허름한 창고였다. 잠시 후 검은색 소나타가 멎더니 백두철이 내렸다. 뺨에 긴 흉터가 있는 그에게 다른 사내들은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어이, 강상우 씨. 왜 그래? 우리 영표 형님의 성의를 사정없이 거절했다던데, 당신 뭘 믿고 그래?”
“영표 형님이라뇨?”
“이거 왜 이래? 황제 클럽 몰라?”
강상우는 그제야 내용을 이해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또 뇌물로 주는 돈에 조금 더 보태어 소방시설을 보완…….”
퍽!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강상우는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땀도 줄줄 흘렀다.
“야, 이 새끼야! 지금 우리 형님께서 너랑 토론하자는 게 아니야. 네놈의 건방진 행동을 꾸짖고 계시는 거야. 언더스탠?”
사내는 야구 방망이를 강상우의 눈앞에 들이대고 흔들었다. 강상우의 눈에는 그 방망이가 무슨 기둥만큼 굵어 보였다.
백두철이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면서 말했다.
“어이, 강상우 씨. 좀 조용히 살자고. 좋은 게 좋은 거고, 당신은 가만있는 게 좋은 거야.”
“…….”
“아니,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영표 형님께 사과드리고 그 확인서인지 지랄인지를 다시 작성해.”
“그건 안 됩니다.”
강상우는 무릎이 꿇린 상태에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뭐라? 안 된다고? 이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안 된다는 거야?”
주먹과 발길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강상우는 피하거나 대항할 상황이 아니었다. 허리 통증으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잠깐! 얘들아, 멈춰봐. … 그래, 강상우 씨. 왜 안 된다는 거야?”
백두철이 구둣발로 담배를 짓이기며 물었다.
“그 확인서는… 윗사람에게 이미 올라갔…….”
퍽!
또 몽둥이가 날아왔다. 강상우는 난생처음으로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밤 여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몰려왔다.
그때 늦게 들어온 빨간 머리 똘마니가 백두철의 귀에 뭐라 말을 넣었다. 백두철은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야, 야! 멈춰 봐. 너희들은 왜 뻑하면 사람을 때리냐? 지금 대화 중인데 말이야.”
부하들을 나무라는 것도 장난처럼 보였다. 아니, 나무라는 척만 하는 장난이 맞다.
“그래, 강상우 씨. 우리 수미 아가씨하고는 어떤 사이야?”
“…….”
의외의 질문에 강상우가 백두철을 쳐다보았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 황 회장이 이걸 지시했나? 나와 수미 씨를 떼어놓기 위해서? 아닐 거야, 설마…….’
강상우는 자신의 추측에 스스로 놀랐다. 그것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일이다.
“말해봐. 우리 수미 아가씨와는 어떤 관계야?”
“그럼, 지금 이 일은 황태규 회장이 시킨 일이오?”
“뭐라고? 이 새끼가 지금 누굴 끌어들여? 감히 우리 회장님을…….”
퍽! 툭탁! 또 주먹과 몽둥이가 날아왔다. 사내들은 처음부터 얼굴에는 별로 때리지 않았다.
“야, 됐어. 그만해.”
백두철이 사내들의 활극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강상우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어이, 강형. 우리 이 정도에서 조금씩 참읍시다. 오늘 일은 우리 회장님 모르게 하고, 일단 병원에 데려다주겠소. 돈 걱정하지 말고 치료부터 받으시오.”
“…….”
“그리고, 제발 다음에는 좋은 얼굴로 봅시다.”
그것으로 악몽의 순간은 끝났다. 사내들은 강상우를 밀양병원 앞에 던지다시피 내려주고 가버렸다.
응급 치료를 마친 강상우는 변종수를 불렀다. 변종수는 강상우를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사, 상우야. 이게 뭐야? 왜 이 모양이야?”
“괜찮아. 별일 아니야. 미친개에게 조금 물렸을 뿐이야.”
“조금이라고? 몸이 엉망인데 이게 조금이라고?”
변종수는 강상우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용히 해. 떠들 일이 아니야.”
“그래, 대체 누가 이랬어?”
“그건 나중에 말하고… 일단 사무실에 휴가 신청을 좀 내줘. 그리고 혹시 수미 씨가 찾으면 본부에 교육 갔다고 말해줘. 병원에 있는 건 종수 너만 알고…….”
“알았어. 근데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
“아니, 좀 있다가 내가 알아서 할게.”
변종수는 강상우가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했고, 강상우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버렸다. 당분간은 모든 연락을 끊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튿날 백두철이 음료수 한 상자 들고 와서, 치료 잘 받으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다음 날 공영표가 와서 병원비를 모두 계산하고 갔다.
<6>
강상우는 수척해진 모습으로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집에 가서는 본부의 교육을 받다가 조금 다쳤다고 했다. 황수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야간 단독 산행을 하다가 실족했다고 말했다. 강상우는 평소에도 야간 산행을 종종 다녔으니까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강상우는 쉬는 날 낮에 황수미를 만났다.
“상우 씨, 본부 교육은 갑자기 갔어? 전혀 말도 없더니…….”
“아, 그거? 본래 승진하기 전에 교육이 있는데… 이젠 끝났어.”
“다친 자리는 괜찮아?”
황수미의 음성에는 걱정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응, 허리가 약간 불편하지만 곧 풀리겠지, 뭐.”
황수미는 자신의 스테이크를 더 덜어주면서 강상우의 표정을 살폈다. 허리 아픈 것 외에도 어떤 불편함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우 씨, 이번 주말에 아빠가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 시간 어때?”
“아니, 지금 내 몸도 그렇고… 좀 있다가 찾아뵈면 안 될까?”
강상우는 지금 당장은 황태규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장인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청부 폭력까지 당하는 사위라면,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찼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태규가 폭력을 지시했는지는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피 시킬까, 상우 씨?”
“…….”
“상우 씨. 지금 무슨 생각을 해?”
“어? 그냥…….”
이때 강상우의 핸드폰에서 카톡 음이 울렸다.
<대형 화재 발생, 즉시 집합, 비상 출동!>
강상우는 얼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황수미가 강상우의 손을 잡았다.
“상우 씨, 허리도 아픈데 오늘만 빠지면 안 돼?”
“빠질 수 없어. 내가 가야 우리 조의 손발이 잘 맞아.”
“조심해. 다치지 말고…….”
“알았어. 오늘은 집에 혼자 들어 가.”
강상우는 허리가 조금 시큰거렸지만, 마음은 벌써 현장에 가 있었다.
화재 현장은 황제 클럽이었다. 한낮이지만 전기가 끊어진 지하 클럽은 암흑이었다. 연기는 많고 출구 찾기는 어려웠다. 현장에는 많은 노인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떤 노인의 고희연 뒤풀이를 하고 있었으니 손님들이 대부분 고령자였고,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한쪽에는 쓰러진 할머니도 보였다.
오늘 당번 조는 1시간 전에 발생한 산불 현장에 투입되었고, 여기는 강상우 팀이 긴급 투입된 것이다. 그런데 현장은 너무 넓고 복잡했다. 요구조자들이 대부분 노약자라서 더 문제였다. 그들은 호흡이 짧고 걸음도 느리다. 불길을 피하면서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용기와 체력이 모두 필요하다.
이미 쓰러진 사람도 몇이 보였다. 비상구와 탈출로를 알려주면 될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축을 해야만 될 사람들이다. 물대포를 함부로 쏠 수도 없다. 3m 앞도 식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는 물대포가 흉기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약자인 경우에는 사람부터 먼저 대피시켜야 한다. 요구조자들을 피신시킬 대원은 강상우까지 포함하여 여섯 명뿐이다. 여성 대원 한 명은 임신 중이라 출동하지도 않았다.
이 시각에 사무실에는 서른 명이나 되는 내근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현장이 어떤 상황이든 그들은 컴퓨터와 서류를 보면서 일한다. 혹은 전화를 받거나 커피도 마신다.
대원들은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노인 일곱 명을 구출한 강상우는 산소 탱크가 바닥났다. 밖에서 산소통을 바꾸어 메고 또 지하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화장실 입구에 구부리고 있는 김장호를 만났다.
“왜 그래? 김장호.”
“주임님, 발목이 또…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족구 하다가 다쳤던 발목이 또 말썽이다. 한 번 다쳤던 자리는 급할 때 이렇게 애를 먹인다. 어린아이 두 명을 양팔로 안고 나가려다가 골절상을 당한 것이다. 다른 대원이 아이들을 안고 나갔지만, 김장호는 얼른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김장호는 산소통까지 비어 있었다. 강상우는 산소마스크 하나씩을 나누어 쓰고 김장호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왔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강용준은 소방 동우회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강 선배님, 지금 황제 클럽에 큰 불이 났습니다.”
강용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허리가 시원찮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단축키를 눌렀으나 전원이 꺼져있다는 응답만 나왔다. 소방서에도 전화해 봤지만 오늘은 비번이라 했다. 혹시나 싶어 다시 전화해 보니 이번에는 비상 출동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잠깐 사이에 두 가지의 상반된 대답을 듣고 혼란스러웠다. 강용준은 택시를 타고 황제 클럽으로 향했다.
‘아, 제발……. 상우는 지금 허리가 안 좋은데…….’
강용준은 가슴이 뛰고, 침 한 방울도 없을 정도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현장까지의 5분이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용준이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에 마침 강상우가 산소통을 바꾸어 메고 다시 지하 입구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상우야! 상우야!”
강용준이 불렀지만 아들은 듣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것을 강용준도 모르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불렀던 것이다.
강상우는 주방 근처에서 몸집이 엄청나게 큰 노인을 발견했다. 족히 130kg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은 심한 기침과 함께 땀을 쏟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잘 걷지도 못하고 구부린 채 가래 끓는 기침을 끝없이 하고 있었다.
강상우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 노인을 부축하여 일어섰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에 극심한 통증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리가 뜨끔하고 머리가 찡했다. 그 자리에 빈 쌀자루처럼 무너져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안 보였다. 강상우는 그 노인에게 자기의 산소통을 주면서 먼저 나가시라고 했다.
노인은 겨우 밖으로 나갔지만, 강상우는 산소통도 없이 혼자 어두운 지하에 남겨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넘어진 테이블에 가려서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온몸에 비 오듯이 땀을 흘리던 상우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산소통도 없이 혼자 남겨졌으니 누군가 먼저 발견하지 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먹이는 황수미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 황태규의 거만한 얼굴도 떠올랐다.
밖에서 발을 구르며 기다리던 강용준이 옆에 있는 산소통을 메고 지하 현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정민이 앞을 막았다.
“선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봐, 이 과장. 당신이라면 자식이 저 밑에 있는데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강용준은 김장호의 방화복을 빌려 입으면서 준엄하게 말했다.
“그래도 다른 대원들이 구출할 테니까…….”
“다른 대원들은 모두 바쁘잖아, 비켜!”
강용준은 김장호의 방화 장갑도 빌려서 끼고 연기가 자욱한 지하로 들어갔다.
“상우야, 상우야! 어딨냐?”
“…….”
강용준은 반대 방향을 보면서 한 번 더 불렀다.
“상우야, 들리냐?”
강상우는 정신이 가물가물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 아버지!”
3m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강용준은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 아직 괜찮구나.’
강용준은 눈물이 핑 돌았다. 소리 나는 쪽의 방향을 대충 짐작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희미한 먹이 냄새를 맡은 개미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상우야, 어디냐?”
“아버지, 나가세요! 여긴 위험…….”
쾅! 콰쾅!
주방에서 프로판가스통이 폭발했다. 강용준은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면서 쓰러졌다. 가스통의 파편에 맞아서 어깨뼈가 부수어졌다. 새로운 불길이 약해지던 불길을 삼키고 악마의 모습으로 맹위를 떨쳤다. 강상우는 꼼짝 못 하고 누운 채 악을 썼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으으. 조금… 다쳤어. 어깨가…….”
강용준은 이를 악물고 겨우 대답했다.
“아버지! 얼른 나가세요!”
억지로 몸을 추스른 강용준의 눈에 아들이 보였다. 새로운 불길로 주위가 조금은 밝아졌기 때문이다. 강용준은 더듬거리며 아들에게 기어갔다. 산소통도 없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아들은 이미 지쳐있었다.
강용준은 아들의 손을 꽉 잡았다. 반갑고 걱정되어 눈물이 왈칵 나왔다. 자신의 어깨 통증도 잊어버렸다.
“상우야, 몸이 어때? 어디가 안 좋아?”
“허리가… 허리가 너무 아파요.”
“그래, 가만있어 봐. 내가 부축해 줄게.”
강용준은 산소마스크 하나를 아들에게 씌워준 다음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척 힘들었다. 그의 왼쪽 어깨는 덜렁거리기만 할 뿐이지 아무런 힘도 못 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보다 무거운 아들을 부축하기란 당연히 어려운 법이다.
“아버지, 먼저 나가세요.”
“안 돼. 같이 나가자.”
“여기 계시면 둘 다 위험해요.”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 넌 말도 많이 하지 마.”
카펫과 의자와 테이블들이 타면서 실내의 공기는 최악의 상태였다. 강용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요구조자들은 모두 구출되었고 대원들도 다 빠져나갔다.
밖에서 김장호가 외쳤다.
“과장님! 강 주임님이 아직 안 나왔어요.”
“아니, 아직도? 아까 부친이 들어가셨는데……”
이 과장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좌충우돌 급하게 보이기만 할 뿐이지 현장을 잘 지휘하지는 못했다. 아니, 어쩌면 허둥지둥하는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상우에 대한 경직된 감정이 그의 생각을 온통 지배하고 있으니까.
대원들은 물 호스의 수압을 조금 낮추어서 지하 현장에 들어갔다. 다행히 주방 쪽에서 강상우 부자는 산소마스크를 하나씩 나누어 쓴 채 땀을 쏟고 있었다. 강용준은 한쪽 팔로 아들의 손을 당기고, 강상우는 한 팔로 바닥을 밀면서 자기 체중의 저항을 줄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대원들이 맨 마지막으로 구조한 사람은 강상우 부자였다. 상황이 다 종료되었다.
이때 큰길 건너편 2층 커피숍에서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흐흐, 이 클럽은 내가 못 하면 아무도 못 해.’
검정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눌렀다.
<7>
그 시각에 변종수는 지리산에 있었다. 마침 비번이라고 다른 친구와 산행을 갔는데 정상에 닿아서야 핸드폰을 차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황수미는 학교에서 합창반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황태규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국회의원 염상정에게 뇌물 공여, 시청 공무원에게 향응 및 뇌물 공여, 건축법 위반까지 얽혀서 내사를 받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던 황태규는 잠깐 쉬는 중에 공영표의 보고를 받았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말이야?”
“저… 불이 났습…….”
“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확하게 말해.”
황태규는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네, 황제 클럽에 불이…….”
“뭐? 뭐라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언제?”
황태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가 휘청하더니 다시 주저앉았다.
“아까… 두 시간 전에 화재가 발생…….”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해?”
“방금까지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으시니까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공영표는 중간에 잘리지 않고 끝까지 말이 완성된 게 무척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황태규가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고 잠깐 말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황태규는 평소에 잘 안 마시던 티백 녹차를 한 잔 마시고 2차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마음이 전쟁터라서 검사의 질문에 무슨 답을 어떻게 했는지 분별이 어려웠다.
화재감식 조사반의 현장 검증 결과는 황태규의 가슴에까지 불을 질렀다. 스프링클러의 작동 불능, 소화기 절대 부족, 비상구 입구의 기능 상실, 프로판가스통의 위치 부적합, 내부 전선의 규격 미달까지 듣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혈압이 엄청 오르고 호흡도 고르지 않았다.
공영표의 연락을 받은 황수미는 아빠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황수미는 일단 아빠를 좀 쉬게 해 놓고 차근차근 수습하기로 생각했다.
황수미는 아빠의 사무실에서 노란색 서류 봉투를 살펴보았다. A4 용지 석 장 분량의 편지는 ‘첫 번째 편지’라고 시작했고, 끝에는 ‘아직 안 터진 폭탄 올림’이라고 되어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황수미는 가슴이 떨렸다. 말하자면 그것은 협박 편지였다.
세금 포탈, 부동산 이중 계약과 사기, 은행 대출 비리, 시장과 부시장 및 은행 지점장에 대한 성 접대, 골프장 캐디에 대한 성추행, 중국의 윤락업소를 불법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마약 밀거래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채무자에 대한 폭행 사주 및 납치 감금 등등을 모두 망라하면 지금 조사받고 있는 혐의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현금 30억을 주지 않으면 방송국과 신문사에 자료를 모두 넘기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사안마다 확실한 근거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신의 재력이면 30억이야 푼돈이니 공연히 머리털 뽑지 말고 후딱 끝내자고 했다.
그리고 돈의 전달 방법과 기한을 따로 연락하겠다는 부분은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만약 경찰에 신고한다면 당신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결과이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황수미는 아빠가 이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욕심은 다소 많지만 그래도 평생 바쁘게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이런 협박까지 당하고 있었다니 갑자기 아빠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느껴졌다.
영남정형외과에는 강상우 부자가 나란히 입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닷새 동안 병실을 함께 쓰면서 모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강상우는 삼풍백화점과 중국의 재난 사고에서도 활약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더욱 굳어지는 시간을 공유했다. 강용준은 아프지만 않으면 이런 시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미옥이 집에서 끓여 온 전복죽을 그릇에 담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영감은 어깨 부수고, 아들은 허리 부수고… 이게 도대체…….”
“부자지간에 119 같이 하고 병실까지 같이 쓰면 그것도 대단한 인연이지. 허허.”
강용준은 웃으면서 여유를 보였다. 죽 두 그릇과 동치미 국물을 놓은 둥근 탁자에 환자복의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강용준은 전복 몇 점을 건져서 아들의 그릇에 옮겨주었다. 이런 행동은 아들의 사춘기 시절부터 했던 일이다. 술도 아들이 군대 갈 때부터 함께 마셨다.
“얘, 상우야. 우리 소주도 한잔 할까?”
“여기서요?”
“그래, 여기서도 괜찮지.”
“에이, 여기서 어떻게 마셔요? 간호사가…….”
똑똑!
똑, 똑, 끊어지는 노크 소리가 차분하고 분명하게 들렸다. 방금 변종수와 직원들이 다녀갔는데 또 누굴까?
문이 열리자 사람보다 향기가 먼저 들어왔다. 노란 프리지어를 한 아름 안고 황수미가 온 것이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어머님도 함께 계시네요.”
“어, 음…….”
강용준은 숟가락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링거병이 매달린 폴대를 밀면서 나가버렸다.
“얘 상우야. 죽 다 먹고 옆으로 밀쳐둬라.”
최미옥도 손지갑만 들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아들의 결혼 문제로 마음이 상해있었다. 보건소 공무원 아가씨의 중매가 들어왔는데, 아들이 보지도 않고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두 분은 사돈이 될지도 모를 황태규의 소문이 좋지 않아서 시큰둥해 있던 참이었다.
“수미 씨. 어떻게 알고 왔어?”
“전화를 안 받고 카톡 답도 없기에 종수씨에게 물어봤어.… 많이 힘들지?”
“…….”
“하필 현장이 우리 건물이고…….”
“누구 건물이든 그건 상관없어. 그리고 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래도 우리 건물이라서 더 미안하고…….”
황수미는 아빠 문제로 마음이 복잡하지만 여기에서 그 말을 할 수도 없어 답답했다.
“수미 씨가 미안하게 생각할 건 없어. … 나, 지금 좀 쉬고 싶어.”
“왜, 내가 있으면 방해돼?”
“아니, 그냥 혼자 생각도 좀 하고…….”
“상우 씨. 아빠에게 문제가 좀 생겨서… 인사는 다음에…….”
“좀 있어 봐. 지금은 치료부터 하고… 결혼은 다시 생각해야겠어.”
강상우는 자신의 귀에도 냉정하게 들리는 제 음성이 너무 낯설어서 속으로 놀랐다. 황수미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강상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결혼까지 다시 생각한다는 거야?”
“아니, 내가 환영 못 받는 사윗감인 것은 인정해. 하지만…….”
“하지만, 뭐?”
“…….”
“상우 씨,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 영 딴 사람 같아.”
“나도 어색한 건 알지만…….”
강상우는 더 말하지 않았다. 백두철에게 당했던 테러를 지금 말하기는 좀 어렵다. 황태규가 시킨 일인지 아직은 확인을 못 했기 때문이다.
<8>
재활 치료까지 열심히 받았던 강상우는 아버지보다 나흘 후에 퇴원했다. 강상우는 이번 황제 클럽 사고에서 모범적으로 활약했고, 그 결과 동료들의 전폭적인 추천으로 일 계급 특진까지 했다.
퇴근하고 동료들과 특진 축하 회식을 했다. 모처럼 소고기 전골과 소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회식이 끝나고 모두 헤어질 때 강상우가 살짝 말했다.
“어이, 종수. 내가 좀 의논할 일이 있으니 따로 맥주 한 잔만 더 해.”
“지금?”
“그래, 지금. … 저쪽 치킨집에 가자.”
두 사람은 길 건너편에 있는 <꼬꼬 치킨>에 들어갔다. 조금 좁지만 답답하지는 않았다.
강상우는 맨 구석 자리로 들어가서 출입구를 마주 보고 앉았다. 입구 쪽이 밝게 보였다.
맥주잔을 받은 변종수가 실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 갑자기 의논이라니 떨리네. 뭔데?”
“으응, 그게 말이야. 내 결혼 문제인데, 아무래도 수미 씨는 좀…….”
“상우야. 말 잘라서 미안한데, 그 문제는 내 의견보다 수미 씨와의 직접 대화가 더 중요하잖아? 나야 어차피 제삼자니까 말이야.”
“그래, 맞아. 당사자의 마음이 제일 중요하…….”
바로 그 순간 강상우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지금 치킨집으로 공영표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오는 저 남자는 누구지? 얌전해 보이는 남자는 좀 낯설다. 아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리송하면 캄캄하게 모를 때보다 더 답답한 법이다.
공영표는 강상우의 대각선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뭔가를 주문하더니 같이 온 남자와 한참 동안 말을 나누었다. 거리도 약간 떨어졌지만, 그들이 하도 목소리를 낮추었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노란 서류 봉투를 주고받은 그들은 맥주 한 잔씩만 마시고 급히 나갔다.
강상우는 머리가 복잡했다. 공영표, 백두철, 납치 폭행, 본 듯한 낯선 남자, 노란 서류 봉투, 뭔가 연결성이 있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황태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등기로 배달된 봉투 속에는 A4 용지 한 장만 달랑 들어있었다. 처음의 편지처럼 15P 정도의 큰 글자인데, 이번엔 내용이 간단했다.
<두 번째 편지. 현금 30억을 금요일 저녁 7시 정각에 박물관 충혼탑 앞으로 가져오시오. 미리 경고하지만, 심부름하는 남자가 잡히면 당신의 모든 불법행위는 TV 뉴스에 다 나갈 것이오. 푼돈으로 끝낼 일에 엉뚱한 실험 정신을 발휘하지 마시오.
추신: 그날은 직접 운전하시오, 비서에게 들키지 말고.
--아직 안 터진 폭탄 올림-->
황태규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곱씹어봤다.
‘아직 안 터진 폭탄 올림’
이것은 상대에게 강한 압박감을 주는 표현이다. 폭탄이란 터진 후에는 파편 조각만 남을 뿐 힘이 없다.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이 실제로 겁나는 법이다. 하지만 폭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직접 운전해서 오라는 말에는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황태규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7년이나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놈이 이렇게도 철저히 조사했을까? 나에 대해서 이 정도로 아는 놈이 누굴까? 공 비서… 그놈이? 그놈이 돈은 많이 밝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내가 살아야 제 놈도 사는데, 그걸 모를까? 그놈이 아니면… 강상우? 참,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했지?’
황태규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담배 맛도 쓰고 골이 흔들거렸다.
‘강상우가 나의 비리를 그렇게 깊이 알 수 있을까? 그놈은 아닐 거야. … 안 되겠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황태규는 인터폰의 1번을 눌렀다. 그러나 공영표는 들어오지 않았다. 버튼을 세 번째 누르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 자식은 어디 갔어? 이런 판에 자리를 비우다니, 혹시 이놈이…….’
황태규가 인터폰의 2번 버튼을 누르자 백두철이 10초도 안 되어 뛰어왔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어, 그래. 백 상무. … 자네 말이야, 지금부터 공 비서를 조사해 봐.”
“네? 공 비서를 조사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놈을 잡아서 족쳐봐. 나한테 협박 편지를 보냈는지 그걸 알아야 해.”
공영표의 욕심 많은 얼굴을 떠올린 황태규는 담뱃불을 끄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회장님, 협박 편지라면… 무슨 내용입니까?”
“어허! 자넨 내용까지 알 필요 없고, 시키는 일만 처리하면 되는 거야.”
“네, 회장님.”
“만약 그놈이 아니라면……. 음, 다른 쪽으로도 알아봐. 24시간 안에 편지 보낸 놈을 찾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황태규의 집무실에서 나온 백두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이번에 공영표를 제거하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백두철은 모처럼 생동감을 느끼면서 빨강 머리에게 명령했다.
“야, 애들 데리고 가서 공영표 잡아와! 최대한 빨리.”
“네? 공영표 형님을… 자, 잡아 오라고요? 왜요?”
“어허! 자넨 내용까지 알 필요 없고, 시키는 일만 처리하면 되는 거야.”
백두철은 황태규의 흉내를 내면서 픽픽 웃었다.
‘흐흐. 나도 이렇게 말하니까 카리스마 짱이네.’
공영표는 20분도 채 안 되어서 창고에 끌려왔다. 무릎을 꿇린 상태로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두 배쯤으로 부어 있었다. 자기가 위의 서열이라고 티를 내다가 더 맞은 것이다. 백두철이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송장이 될지도 몰랐다.
“두, 두철아. 아니, 백 상무! 왜 이래? 말은 안 하고 때리기부터 하니까…….”
백두철이 못 들은 척하고 침을 찍 뱉으면서 빨강 머리에게 물었다.
“야. 어디서 잡았어?”
“회장님 에쿠스 안에서 전화질 하고 있는 걸 제가 잡았습니다. 형님.”
빨강 머리는 한쪽 어깨를 올리면서 ‘제가’라는 부분에 힘을 줬다.
“그래? 전화를 했다고? 음… 영표 형님, 그 폰 이리 내슈.”
“포, 폰은 왜?”
“어허! 뭔 말이 그리 많소?”
백두철의 짜증 섞인 말에 빨강 머리가 공영표를 쥐어박으며 불쑥 내뱉는다.
“따지지 말고 빨리 내 놓으슈. 말을 잘 들어야 안 맞지.”
빨강 머리는 공영표의 떨리는 손에서 폰을 낚아채며 생각했다.
‘흐흐, 선배 새끼 패니까 재밌네. 나는 두철이 형님만 따라가면 돼.’
백두철은 넘겨받은 폰에서 카톡과 문자 메시지 목록부터 먼저 보았다. 그러나 스팸 몇 개씩 외에는 저장된 내용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일부러 삭제한 것처럼 깨끗했다. 대신에 통화목록에는 ‘검정 모자’라는 발신자 번호가 많았다.
“검정 모자가 누구요?”
“아, 그… 고향 친군데… 별거 아니…….”
퍽!
빨강 머리는 단순하고 손이 가볍다. 오늘은 어린이날을 맞이한 아이처럼 신나게 보인다. 좀 더 때리고 싶어 하는 빨강 머리를 눈짓으로 멈추게 한 백두철이 말했다.
“영표 형님. 이제 대화 좀 해봅시다.”
“그래. 제발 좀… 말로 하자고.”
“형님. 회장님께 보낸 그 편지 누가 썼는지 알아요?”
공영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 영감쟁이가 경찰에 알리지 말라고 했더니 두철이에게 말했구나. 인제 어쩌지?’
그러나 공영표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딱 잡아뗐다.
“편지라니? 무슨 편지 말이야?”
“에이. 형님. 이거 왜 이래요? 선수끼리 자꾸 오리발 내면 피곤하지요. 얘들아!”
퍽! 툭탁!
백두철의 눈짓에 따라서 또 주먹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잠깐, 잠깐! 말할게. 제발 그만…….”
공영표는 매가 아프기도 했지만, 후배들에게 당하는 것에 모멸감이 밀려왔다.
백두철은 공영표에게 플라스틱 의자를 밀어줬다. 공영표는 물을 좀 달라고 했다. 입을 헹구니까 핏물이 푹 나왔다. 공영표는 물을 마시면서 얼른 머리를 굴렸다.
‘지금 들통나면 모든 게 물거품이다. 남경수가 영감쟁이를 더 졸라서 돈을 빨리 받아야 한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시간을 끌자.’
“자, 이제 말하시오. 회장님께 편지 보낸 사람이 누구요?”
백두철은 3년 선배를 문초하는 맛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상황을 즐겼다.
“그런 편지라면… 강상우가 보냈을 거야.”
“강상우? 전에 여기 끌려왔던 그 119 자식 말이오? 아니, 그놈이 왜?”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여.”
“그놈이 회장님을 협박할 이유가 뭐요?”
백두철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고, 공영표는 억지로라도 이해시키려고 생머리 짜내는 표정이었다.
“그건… 아마 녀석이 돈 욕심으로…….”
“돈이라면, 협박이나 위험한 짓 안 해도 황수미 씨만 잡으면 어차피 제 돈이잖아요?”
“글쎄, 그래도 돈이란 급하게 필요할 수도 있거든.”
“그럼, 형님 말대로 그놈을 족쳐보면 알 수 있겠네요.”
“그, 그렇겠지.”
공영표는 일단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고, 돈을 빨리 찾아서 튈 생각뿐이다. 최악의 상황에, 돈을 못 받아도 황태규의 비서직은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는 계속 돈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잘하면 언젠가는 한밑천 잡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상우를 미끼로 던져주고 반전의 기회를 노릴 심산이다. 역시 잔머리 회전은 빠르다.
“얘들아, 가서 강상우 잡아 와!”
백두철의 명령에 부하들이 우르르 나갔다. 백두철은 <미리벌주유소> 상호가 인쇄된 휴지를 던져주면서 한 마디 툭 뱉었다.
“피 닦고 가 보슈. 치료비는 있지요?”
씨팔 놈! 개 패듯이 패 놓고 치료비도 안 주나? 그러나 공영표는 이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박물관 공원 벤치에서 강상우와 황수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우 씨, 그저께 우리 결혼식 다시 생각해 보자는 말은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왜? 내가 싫어졌어? 지금 그 말은… 혹시 절교 선언이야?”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는 뜻이야.”
강상우는 자신이 집단 폭행을 당한 사실을 지금까지는 숨겼다. 다행히 얼굴에 상처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숨기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로 황태규의 폭행 지시 여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만 풀리면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는 것을 강상우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강상우는 며칠 전에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황수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그 일을 배후에서 지시한 사람이 누군지 좀 생각하느라고…….”
“아니, 그래. 그 일을… 누가 지시했다는 거야?”
황수미의 큰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방금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아직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르신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상우 씨! … 그게 무슨… 말도 안 돼! 사람에게 폭행이나 지시할 아빠가 아니야. 아니, 나를 봐서라도 상우 씨에게 그런 일을…….”
하지만 황수미는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한 곳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강상우는 흔들리는 황수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바로 그때, 검은색 승합차가 벤치 뒤에 멈추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 와서 다짜고짜 강상우를 끌고 갔다. 강상우는 약간 저항하다가 그냥 제 발로 따라갔다. 지난번 납치와 폭행에 이어 병원에까지 태워갔으니까 뻔히 아는 얼굴들이다. 이 사내들을 따라가서 부딪쳐야만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두 알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강상우는 자신의 발로 승합차에 올랐지만, 황수미는 울면서 발을 굴렀다.
승합차가 출발하자 황수미도 자신의 차로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왼손으로 핸드폰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손이 떨리고 목소리까지 떨렸다.
“아, 아빠, 저예요! 지금 상우 씨가 납치되고 있어요.”
“나는 모르는 일이야.”
“아빠가 시켰어요? 저 사람들 누구예요?”
“…….”
황태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빠, 대답하세요.”
“…….”
빵! 빠-앙!
황수미가 지그재그로 운전하니까 뒤에 오는 버스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댔다.
“아빠! 지금 벌어지는 일을 당장 멈추게 하세요.”
“넌… 빠져 있어. 이 일은 아비의 일이다.”
황수미는 방금 이 말에서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 상우 씨는 제 남자예요. 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마세요.”
“아비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잠자코 있어. 전화 끊어.”
황태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 황태규 역시 강상우를 쫓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강상우만 없어지면 염병재를 사위로 맞을 수 있겠다는 욕심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은 그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잡아서 닦달은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납치나 폭행까지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다. 황태규는 백두철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두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쾅!
신호 위반까지 하면서 곡예 운전을 하던 황수미가 옆 차선의 택시를 들이받았고, 그 앞의 자동차들이 4중 추돌을 했다. 황수미는 갓길에 차를 대면서 검은색 승합차의 번호를 메모했다. 그리고 바로 변종수에게 전화했다.
“종수씨, 지금 상우 씨가 납치되고 있어요.”
차창 밖에서는 택시 기사가 눈을 부라리며 핏대 올리고 있었다.
“납치라고요? 누구에게, 아니 지금 어딥니까?”
“낯선 남자들인데, 일단 차 번호부터 적으세요.”
황수미는 변종수에게 승합차의 번호와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이어서 자동차보험에 전화했다. 창문도 내리지 않고 의자를 뒤로 넘겼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고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바락바락 고함지르는 택시 기사의 얼굴 위에 아빠 얼굴과 강상우의 얼굴이 복잡하게 겹쳐졌다. 시골 한옥의 무너진 토담 사진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아, 우린 결국 이렇게 무너지는가?
변종수는 출근 직후라서 근무복을 갈아입던 중에 황수미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상우가 납치됐다고? 낯선 남자들이라고?’
마음이 급해진 변종수는 김장호를 불렀다.
“어이, 김장호! 빨리 1호 차 빼!”
변종수가 하도 급박하게 외치니까 김장호는 이유도 묻지 못하고 1호 소방차를 빼냈다. 경광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차를 몰았다. 일반 차가 아니고 소방차라서 다른 차들이 잘 비켜 주었다. 그러나 황수미의 추돌 사고로 시청 주변의 교차로는 조금 막혀있었다.
변종수는 교통경찰과 택시 기사에게 사람이 위험한 상황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현장 수습은 방금 도착한 보험 직원에게 맡기고 황수미를 소방차에 태웠다.
“장호야, 빨리 가자!”
김장호가 소방차를 막 움직일 때 무전기에서 고함이 들렸다.
“야! 변종수, 변종수!”
“네, 과장님. 변종숩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보고도 없이 어디 가는 거야?”
“저, 지금 119 구조하러 갑니다.”
“119를 구조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네, 강상우가 조폭들에게 납치당해서 구하러 갑니다.”
“강상우가?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이정민은 뇌물 맛을 본 강상우가 이제 조폭들과도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일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 같다. 짧은 순간이지만 묘한 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변종수는 이정민과 계속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다.
“네, 과장님.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전기를 꺼버린 변종수가 빠르게 말했다.
“야, 김장호. 좀 더 밟아!”
방금 택시 기사와 실랑이하느라 지체되어서 변종수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우리가 갈 동안에… 제발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변종수의 마음은 불안하고 바빴다. 그것은 김장호도 마찬가지였다.
황수미는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애를 태웠다.
‘설마 아빠가 그런 일까지……. 제발 더 이상은 안 돼. 아, 하나님!’
벌써 강상우는 의자에 묶인 채 주먹질을 당하고 있었다.
백두철이 제 얼굴의 칼자국을 슬슬 문지르며 물었다. 이런 동작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준다는 생각으로 그가 자주 하는 버릇이다.
“그 편지, 누가 보낸 거야? 더 맞기 전에 빨리 불어!”
“편지라니… 무슨 편지 말이냐?”
“우리 회장님께 보낸 편지 말이야.”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뭘 불라는 거야?”
퍽!
빨강 머리가 또 주먹을 날렸다. 그는 옆에 백두철만 있으면 무조건 용감해진다. 강상우는 맞는 순간에도 궁금증이 생겼다. 황 회장에게 누가 편지를 보냈을까? 그리고 편지는 어떤 내용일까?
바로 그때 멀리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GPS의 유도점을 따라서 소방차가 멎은 곳은 백두철이 늘 이용하는 창고였다. 변종수가 황수미에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 놓고 창고에 뛰어들어갔다.
변종수와 김장호는 야구 방망이로 무장한 사내들과 마주 섰다. 회칼을 들고 있는 두 명까지 포함하면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7 : 2라면 이쪽이 불리하다. 더구나 그들은 모두 무기를 들었고 이쪽은 빈손이었다.
하지만 변종수는 용기를 내었다. 며칠 전 황제 클럽 화재에서 다른 대원들은 모두 고생했는데 자신은 빠졌지 않은가. 그날 강상우 부자가 많이 다쳤기에 내심 마음의 짐이 되었던 것이다. 변종수는 큰 목소리로 자수를 권했다.
“어이, 인제 그만 멈추고 자수하지.”
“자수 좋아하네. 얘들아, 깨버려!”
변종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놈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공격할 태세였다. 백두철의 명령에 사내들은 느물 느물 웃으며 서서히 다가왔다. 변종수가 벽을 등지고 서서 사내들의 방망이를 피하고 있을 때 김장호는 차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백두철이 웃었다.
“이야!. 그나마 쫄따구는 꽁지 빠지게 튀어버리고, 이제 아저씨 혼자 남았네. 불쌍해서 어쩌지?”
변종수도 무척 암담했다. 아, 김장호가 이럴 수 있나?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어서 허탈했다. 묶여있던 강상우도 머리를 흔들며 절망감에 빠졌다.
백두철이 큰 소리로 웃으며 빈정댔다.
“우하하! 119 아저씨. 친구는 묶여있고 쫄다구마저 내뺐으니 그대도 무릎 꿇어야지.”
백두철이 담배를 피워 물고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때 갑자기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김장호가 물대포의 호스를 끌고 온 것이다.
“선배님, 비키세요!”
“어, 그래! 김장호, 역시!”
변종수는 옆으로 비키면서 양손의 엄지를 치켜올렸다.
백두철은 어깨에 물줄기를 정통으로 맞고 벌렁 나자빠졌다. 다른 사내들도 가슴이나 엉덩이나 아랫배에 맞고 모두 꼬꾸라졌다. 김장호는 물줄기의 방향을 옮기면서 마치 대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 모으는 것처럼 사내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김장호의 물대포 다루는 솜씨는 수준급이다.
“물 맞기 싫으면 그 자리에 무릎 꿇어!”
변종수의 말에 모두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한 사내가 도망치다가 등에 물을 맞고 키대로 자빠졌다. 사내들은 모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김장호는 두 선배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 후,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이 도착했다. 황수미가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백두철과 일당들은 폭행 현행범으로 즉석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경찰서 출입 기자의 취재와 황수미의 동영상 제공으로 TV 뉴스에도 나왔다. 이정민은 부하들을 칭찬하는 자신의 인터뷰 모습을 화면으로 보았다. 입맛이 쓴 것을 느꼈다.
<9>
황태규도 입건되어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변호사를 통해서 염상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염상정은 또 정치 후원금이 생기겠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검사실로 갔다.
“검사 영감, 고생 많지요?”
“아이고, 의원님. 어서 오십시오.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허허, 영광은 무슨… 이번에 내 아우님이… 그, 이상한 일로 말이지…….”
염상정이 약간 우물거리고 있을 때 비서관이 와서 귓속말을 했다. 염상정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검사 영감, 갑자기 일이 좀… 일간 다시 오겠소.”
염상정은 뒤도 안 돌아보고 검사실을 나갔다. 차 안에서 중앙당으로 전화를 하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었다. 비서관의 말이 맞는 것이다. 공천 배제 현역의원 명단에 포함됐다는 TV 뉴스는 사실이었다. 쉽게 말하면 공천 탈락이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어쩐지 불안해서 공천 심사위원장과 실세들에게 돈을 줬는데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평소 상임위원회에 자주 빠지던 그가 회의 시간에 사우나에서 목욕하다가 기자들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그때 기자들에게 돈 봉투를 주기도 전에 원내 총무가 먼저 알아버린 것이다. 그 일로 계파가 다른 원내 대표에게 손발이 닳도록 빌며 훈계를 들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국회 연설하는 중에 스마트폰으로 주식 시세를 보다가 기자들에게 들킨 적도 있다. 요즘 기자들은 국회의원의 메모지까지 찍어댄다. 게다가 지역 유지들과 골프 치면서 캐디의 몸을 만지는 일도 기자들이 알아버렸다.
푼돈을 아낀다고 입막음을 제대로 못 한 그는 기자들에게 괘씸죄로 찍혀서 계속 추적을 당했다. 기자들 중에서도 특히 정치부 기자는 ‘고성능 안테나’로 통한다. 평소에도 원내 대표와 주요 당직자들은 그에게 정치력이 빵점이라고 눈을 흘겼다.
염상정은 자신의 공천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황태규 문제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토요일 낮 12시 20분.
한식당 삼오정에서 상견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1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미루어서 만들어진 자리다. 강상우는 부모님과 함께 왔으나 황수미는 혼자였다. 황수미는 며칠 전부터 오늘의 만남을 말했고, 오늘 아침에도 참석하겠다는 아빠의 말을 그냥 믿었었다.
연신 시계를 보면서 초조감을 느끼던 황수미가 밖으로 잠깐 나왔다. 복도에서 전화를 했으나 황태규는 받지 않았다. 황수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저… 아버님, 죄송합니다. 아빠께 갑작스러운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일단 먼저 식사부터 하시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면…….”
“그래요. 우리는 괜찮아요. 사업하시는 분이라 갑자기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강용준은 대수롭잖게 넘어갔지만, 최미옥은 못마땅한 표정이다. 밥을 먹고 수정과까지 마셨으나 올 사람은 오지도 않고 전화마저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황 선생, 우린 말이오. 상우 결혼식에 대해서는 본인의 판단을 존중할 것이오. 상우가 어릴 때부터 우린 그렇게 키웠거든.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라고 맡겼는데, 지금까지 잘해왔어요. 이번에도 우린 상우를 믿고 지켜볼 것이오.”
강용준의 말은 분명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아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본래 부자간의 신뢰가 남달랐지만, 특히 함께 입원했을 때 많은 대화를 통해 아들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어진 것이다.
“아버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저희가 잘 상의해서 진행하겠습니다.”
황수미가 눈을 빛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결혼식에 시간 맞추어 참석할 것이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강용준의 이 말은 시간관념이 부족한 황태규에 대한 섭섭함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황수미가 적절한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을 붉힐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없었다. 누굴까? 황수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강상우는 보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황수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저, 아가씨. 저는 공영표라고, 회장님 비서입니다.”
“아, 네. 알아요. 그런데 비서님이 어쩐 일이세요?”
“저, 놀라지 마시고… 지금 경남병원 응급실로 빨리 좀 오십시오.”
“왜요?”
“네, 회장님이 지금 위험하시니까 얼른 오십시오.”
“아빠가요?”
황수미는 가슴이 철렁했다. 앞자리의 어른들께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수미 씨, 같이 가! 아버지, 이걸로 계산 좀 해주세요.”
강상우는 현금 카드를 아버지에게 주고 후다닥 따라 나갔다. 강상우는 주차장에서 황수미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황수미는 그냥 울기만 했다.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강상우는 황수미를 안심시키려고 말했지만, 상황을 전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응급실에 뛰어가니 조금 전에 특실로 옮겼다고 일러줬다. 엘리베이터로 3층 특실에 갔는데 입구에서 낯선 사내 두 명이 강상우를 막았다.
“이보시오, 당신은 못 들어가요.”
“아니, 잠깐만 좀…….”
“안 돼요. 아가씨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도대체 왜요?”
“우리도 몰라요. 비서님의 지시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혼자 들어간 황수미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빠의 얼굴이 백납처럼 하얬다. 그리고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공영표가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된 일이에요, 비서님?”
“저… 회장님께서 칼로 손목을 그어서…….”
“칼로… 손목을? 아, 안 돼요. 아빠!”
침대로 달려가는 황수미를 공영표가 막았다.
“안 됩니다, 아가씨. 회장님 방금 잠드셨습니다.”
“의사는 뭐래요? 괜찮대요?”
“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분간 절대안정이 필요하답니다.”
공영표는 황수미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세한 과정을 설명했다.
“회장님은 오전 내내 사무실에 계셨습니다. 오늘 삼오정에서 점심 약속이 있다고 아침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가실 시간이 돼도 안 나오시기에 노크를 했는데 답이 없었어요. 문이 안으로 잠겨져 있어서 부수고 들어갔더니… 회장님은 소파에 앉은 채로 왼쪽 손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오른손에는 문구용 칼이 들려있었고요. 제가 빨리 발견하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 세상에! 우린 그것도 모르고, 아빠를 기다리다가… 먼저 식사를 했어요.”
“그럼, 오늘 삼오정 점심 약속은 아가씨와…….”
“그래요. 제 남자 친구와 어른들 모시고 상견례를 하려고 했어요.”
순간 공영표의 눈썹이 꿈틀 했다.
‘남자 친구라면 강상우 아닌가? 강상우가 영감쟁이와 상견례를 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아직 백두철이 강상우를 못 잡았나? 협박 편지는 강상우가 썼다고 말해줬는데, 두철이 이놈은 왜 이렇게 꾸물거려? 늦을수록 불리한데.’
공영표는 복잡한 생각으로 내심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저,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어요. 상우 씨에게 상황을 알려야 해요.”
“아, 네. 그러십시오. 여긴 제가 있으니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1층 로비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황수미는 강상우에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상우 씨, 무서워. 아빠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당황하지 마. 뭔가 내막이 있을 거야.”
황수미의 손을 잡아주면서도 강상우는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황 회장이 나에 대한 폭행 지시를 한 게 아닌가? 그리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 많은 재산을 남겨두고 자살을 기도하는 것도 이상해. 비서가 밖에 있는데 사무실에서 손목을 그어? 아무래도 뭔가 앞뒤가 안 맞아. 자살이 아니면 누군가 살해를?’
강상우는 공영표와 <꼬꼬 치킨>에서 이야기하던 그 남자를 문득 떠올렸다.
‘어디서 봤더라? 그 남자는 공영표와 어떤 사이일까? 혹시 그 남자가 협박 편지를 썼다면? 공영표와 작당하여 황태규 회장을 살해하려고……. 아닐 거야. 살해하려면 제3의 장소가 낫지 황 회장의 사무실에서는 하지 않을 거야. 공영표는 황 회장을 항상 수행하니까 다른 장소를 만들기 쉽지. 게다가 아직 30억을 받지도 않았는데 급히 죽일 이유가 없잖아.’
강상우는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마셨다. 늘 황수미보다 급히 마시는 편이다.
“상우 씨, 잠깐 기다려. 병실에 핸드폰 두고 왔네.”
“아니, 수미씬 커피 마시고 있어. 내가 얼른 다녀오지.”
강상우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묘한 예감이었다.
그 시각에 병실에서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공영표가 황태규를 살해하기 위해 베개로 얼굴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흐흐, 이 영감쟁이가 죽어야 모든 일이 깔끔하지. 기회는 지금 뿐이야.”
“읍, 읍!”
황태규는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버둥거렸다. 이미 이성을 잃은 공영표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흘리면서 베개 누른 팔에 힘을 주었다.
병실 앞에서는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안돼, 당신은 못 들어가.”
“아니, 수미 씨 폰 가지러 왔으니 잠깐만…….”
강상우와 두 사내 사이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 사내가 강상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강상우는 뒤로 슬쩍 물러나면서 그 사내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차고, 돌려차기로 다른 사내의 턱을 가격하여 간단히 제압했다. 사내들은 강상우가 태권도 5단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강상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영표는 베개로 황태규를 누르고 있었다. 강상우는 재빠르게 달려들어서 단 한 주먹에 공영표를 쓰러뜨렸다.
그때 간호사들과 황수미가 들어왔다. 황수미는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아빠, 아빠! 정신 차리세요.”
강상우는 황수미를 비키게 하고 실신한 황태규에게 인공호흡을 했다. 잠시 후 황태규가 눈을 떴을 때, 공영표와 두 사내는 출동한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가까스로 상황이 진정된 후에 황태규는 딸에게서 사태의 경위를 듣게 되었다. 공영표가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다니,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그놈이 나를 배신하다니… 감히 그놈이…….’
황태규는 분한 마음에 치를 떨었다. 이어서 자신의 아집과 독선에 대하여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강상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날 용서하고 우리 수미와 잘 살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리고 나는 백 상무에게… 폭행 지시를 하지 않았네. 다만, 그 사람들이…….”
“괜찮습니다, 어르신. 이제 다 풀어졌습니다.”
황태규의 창백한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수미는 연두색 손수건으로 아빠의 눈물을 닦으면서 자신의 눈에 고인 눈물도 찍어냈다.
“아빠, 손목은 왜 그랬어요? 제 생각도 안 하시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이거… 나도 모르는 일이야.”
황태규가 붕대 감긴 손을 힘없이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모르신다고요?”
황수미의 큰 눈이 더 커졌다.
“그래. 상견례에 갈 시간이 되어서… 공 비서를 불렀는데… 공 비서가 들어왔는데…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잘 생각해 보세요, 아빠.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요.”
“……”
“혹시 공 비서가 다른 날과 좀 다른 점이 없었어요?”
갑자기 황태규의 눈빛에서 어떤 생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무슨 손수건 같은 걸 갖고 내 쪽으로 왔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구나.”
“잠깐만요, 어르신. 손수건이라 하셨죠? 그가 들어오기 전에 어르신께서 손목을 그으신 게 아닙니까?”
강상우가 빠르게 물었지만 황태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내 손목을? …… 말도 안 돼. 난 그렇게 모진 짓은 못 하네.”
이제 강상우의 생각은 거의 가닥이 잡혔다. 공영표가 마취제로 황태규를 마취시킨 후, 미리 준비한 문구용 칼로 손목을 그었을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황수미에게 먼저 전화한 것은 그가 경찰의 개입을 꺼렸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황수미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공영표의 모험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럼 왜 황수미에게 전화를 했을까? 강상우는 이 부분에서 생각이 막혔다.
경찰은 공영표의 원룸을 수색했다. 책상 서랍에서 협박 편지의 초안이 나왔다. 볼펜으로 마구 휘갈겨 쓴 글은 노란 봉투 속의 협박 편지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규의 도장이 찍힌 유언장도 나왔다. 전 재산을 황수미에게 상속하되 지금까지 열심히 보좌해 준 공영표 비서에게 현금 50억 원을 증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언장은 공영표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것이다. 법무사 사무실에 심부름 다닐 때 황태규의 도장을 갖고 다니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공영표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여 주도면밀한 대비를 한 것이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황태규를 살해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다만 용기와 실행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남경수도 방화 혐의로 수배되었다.
<10>
맑고 포근한 봄날이다. 소방서 앞의 화랑예식장에서 강상우와 황수미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변종수가 사회를 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일주일이나 연습한 내용이다.
“하객 여러분, 저는 신랑 친구인 변종수라고 합니다. 신랑 강상우 군은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소방대원입니다. 그는 동료와 후배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진정한 119입니다.
그러나 119도 힘들고 위험한 순간에 빠질 수 있습니다. 119도 구조의 손길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와 성원이 119를 구조하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애앵, 애애앵!”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났다. 변종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카톡을 확인했다.
<시청 옆 상가에 대형 화재 발생, 긴급 출동, 즉시 집합!>
“여기 누가 사회 진행 좀 하세요. 불났어요, 불!”
변종수는 넥타이를 풀면서 허겁지겁 나갔고 다른 동료들도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뛰어나갔다. 강상우는 어깨만 으쓱 올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강용준은 급히 일어나서 나가려다 최미옥에게 손목을 잡혔다.
“어이구! 사이렌 소리만 나면 그저…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최미옥의 지청구에 강용준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황태규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에, 이 경사스러운 날에 불이 난 것은 양가에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그야말로 대박 예감입니다. 믿음직한 소방대원들이 출동했으니 걱정 없이 예식을 계속하겠습니다. 투잡 시대니까 사회자 진행도 제가 겸하겠습니다.”
주례가 노련한 임기응변으로 분위기를 잡아서 결혼식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끝- (원고지 25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