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 내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던 등산 경험은 2022년 경상남도 지리산 정상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올해 5월에 제주도 한라산 영실코스를 완주하며 1순위가 바뀌었다.
한라산 등산 코스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중 영실코스는 백록담 호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신, 봄에 철쭉이 만개하고 윗세오름과 선작지왓(고원의 평야지대) 등 구간마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백록담까지 가는 코스는 올라가는 동안 유사한 풍경이 반복되고 막상 정상에 도착하더라도 1년 중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거나 물이 차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첫 등산인지라 성공률을 높이고 싶어 영실코스를 택했다.
실제로 등산로 출입구에 들어서고 나오기까지 어느 공간도 허투루 지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었다.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출 때마다 지나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안개 없이 맑은 날씨 덕에 저 멀리 바다까지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수평선이 내 눈높이와 동일선상에 놓였고, 조금 더 올라가서는 몇몇 구름은 아래에 있었다. 발밑 아래로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은 거대 브로콜리 군집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그곳에 뛰어들면 통통 튀어올라 숙소까지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포근한 초록색이었다. 계단을 오를 때도 멈출 때도 시선을 어디에 두든 자연이 덩어리 채 굴러왔다. 새삼 제주도에서 한라산의 비중이 크다는 걸 깨닫고, 한라산을 비롯해 제주도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처음 목표한 윗새오름에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남벽분기점까지 이르렀다. 영실코스에서 갈 수 있는 종점으로, 가장 가까이서 백록담을 올려다볼 수 있다. 그곳에서 백록담 CCTV를 검색해 보니 흔치 않다던 물이 차 있었다. 초능력만 있다면 손으로 벽을 끌어내려 백록담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아쉬운 소리일 뿐, 그간 올라온 길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기에 후회는 없었다.
(왼쪽) 계단을 오르다 뒤를 바라봤을 때 풍경, 날이 좋아 바다까지 보인다. (오른쪽) 남벽분기점에서 올려다 보는 방향 위에 백록담이 있다.
어느 5월 5시간 30분간 산행 기록을 요약하자면 위와 같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의 근황을 알릴 때마다 자랑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 속 수평선, 푸릇푸릇한 나뭇잎, 쾌청한 하늘을 하나하나 짚은 후 "정말 좋았어요"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하기. 호응해주는 이들의 반응을 듣고 약간의 정적. 그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정적이 조금 길어질 때마다, 말할지 말지 고민했던 문장이 있다. "근데 산마다 소리가 다르다는 거 아셨어요?"
이번 한라산 완주를 위해서는 '산체력'을 길러야 했다. 재작년 지리산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과 그에 딸려오는 근육통을 맛본 후 오랫동안 사진첩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작년에는 교통사고를 두 차례 겪어 허리 재활 목적의 필라테스 위주로 운동했다. 1년 넘는 공백이 걱정돼 4월부터 여유될 때마다 이곳저곳을 오르내렸다.
가깝게는 회사 점심식사 후 뒷산, 주말 이른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집 앞산, 공휴일에는 대전 보문산과 계족산에 갔다. 쉬는 동안 지구가 더 뜨거워진 걸까, 아니면 퇴근 후 눕기만 해서 금방 지치는 걸까. 아침이라 춥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5분만 지나도 땀이 줄줄 흘러 얇은 외투마저 벗었다. 달랑달랑 허리에 묶은 외투가 일으키는 미세한 바람을 느끼며 올라간다. 동행자와 말하다가, 혼자 이어폰을 껴고 팟캐스트를 듣다가 어느 순간 바깥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 산에서 나는 새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저 멀리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 소리, 뒤에서 두런두런 대화 나누는 목소리.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우나 산마다 풍겨내는 소리가 다르다. 비록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라디오로 녹음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딱 내가 영상 촬영으로 녹음할라치면 조용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산의 콘서트는 방문자 한정이고 별도의 녹취는 불가하다고 안내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욱 이곳저곳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포로롱, 짹짹, 뻐꾹뻐꾹, 까악, 빼빼 빼빼 다양하게 노래하는 새들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나의 발자국 소리와 제법 용기 내 먼저 "안녕하세요"라 인사 건네는 것도 산소리에 보탬이 되려나. 무더위가 지나면 가을에 또다시 이곳저곳 산을 가볼 예정이다. 그때는 이렇게 직접 화두를 던질지도 모르겠다. "산마다 내는 소리가 계절 따라 또 다르다는 걸 얼마 전 알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