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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한다는 것, 언어를 안다는 것

'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by 정진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언어를 아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원어민은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이해한다. 난생 처음 보는 전단지를 읽을 수 있고, 처음 거는 전화를 잘 마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어를 꼭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원어민이 모국어를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한국어 단어 '고구마'에는 'ㄱ(기역)'이라는 소리가 몇 개 있을까? 당연히 두 개 있다. 첫 음절에 하나, 두 번째 음절에 하나. 그러면 두 'ㄱ'은 똑같이 발음될까? 그렇지 않다. 첫 번 째 'ㄱ'은 /k/로, 두 번째 발음은 /g/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한국어 모어 화자는 보통 의식하고 듣지 않는 이상 이를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반면 외국인 학생들에게 '고구마'의 두 기역이 어떻게 소리나는지 알파벳으로 써 보라고 하면 /k/와 /g/의 구별이 더 잘 드러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같이 교육열이 높은 비영어권 국가 학생들은 현재완료(present perfect)니 부정어구 도치와 같은 문법적 지식을 곧잘 배우곤 한다. 물론 모든 학생이 문법을 잘 하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언어에 대한 지식을 제공받고 숙지한다. 반면 영어권에서 자란 영어 모국어 화자가 모두 해당하는 문법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둘 중 영어를 잘 구사하는 것은 당연히 영어 모국어 화자일 것이다. 이처럼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과 언어를 잘 아는 것은 다르다.


언어학(Linguistics)은 언어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따라서 언어에 대한 지식과 문법을 통해 언어를 알고 싶다면 언어학을 참고하는 것은 괜찮은 생각이다. 그런데 언어를 잘 구사하는 것과 언어적 지식이 같은게 아니라면 그런 지식이 애당초 왜 필요할까?


내 생각에 언어를 잘 이해해서 좋은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다. 첫째로 언어에 대한 지식은 실용적이다. 우선 외국어 구사를 돕는다. 방금 언어 구사와 이해를 구별해야 한다고 했지만 둘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실은 특히 유년기 이후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중요한데, 이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라는 개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결정적 시기 가설에 따르면 언어를 모국어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청소년기만 지나도 외국어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습득하기 어렵다.


성인기에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난 이민 1세 중에는 몇십년이 지나도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경우 문법을 비롯한 언어 지식의 도움을 받는 것이 효과적이다. 언어학을 통해 언어를 다소나마 이해하면 외국어 문법의 불규칙함을 넘어 나름의 질서를 인식할 수 있다. 문법은 단순히 수많은 규범과 지침을 백과사전적으로 쌓아놓은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문장을 가능케 하는 원리를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법과 언어 지식을 통해 외국어를 학습하는 경우 모국어의 보조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좋은 접근이다. 결정적 시기를 지나 외국어를 학습하는 경우 이미 확립된 모국어의 보조를 통해 더 확실한 외국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외국어 학습 뿐 아니라 각종 기술과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도 유용하다. 가령 Open AI의 Chat-GPT로 대표되는 대화형 인공지능, 음성 인식이나 음성 검색부터 고전적인 인터넷 검색까지 자연 언어가 관여되는 기술에는 언어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또한 용어를 둘러싼 여러 논란이나 언어 순화 정책, 영어교육이나 문해력 등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어줄 수 있다. 이처럼 언어학적 지식은 실용적인 측면이 있다.


둘째로 언어는 그 자체로 탐구할 가치가 충분한 대상이다. Hauser, Chomsky, and Fitch (2002)는 인간 언어가 여타 동물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뚜렷하게 구별됨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 언어는 재귀(recursion)를 통해 제한된 언어 요소와 한정적 운용 원리만으로 이론상 무한한 표현을 생성해 낼 수 있으나 꿀벌이나 침팬지 등의 여타 동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그렇지 못하다. 문법 체계를 통해 단발적인 신호를 넘어 창조적 표현의 생성 및 이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인간 언어이다. 인간을 이해하는데에 있어 언어는 중추적인 현상이며 심리, 인지, 사회 등의 타 분야와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마치 물리학, 수학, 문학, 윤리학이 직접적 응용 가능성이 없음에도 여전히 중요한 학문인 것과 같이 언어학도 그러하다.


여기서는 언어학의 아주 일부분을 너무나 얕게 다룬다. 더 깊고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각 대학의 강의계획서, 유명 교과서, 최신 논문 등을 찾아보고 생각하길 권한다. 특히 대부분의 글이 생성문법(generative linguistics)에 기반하여 쓰였기 때문에 다른 접근법이 궁금하다면 기능문법이나 역사비교언어학, 인지언어학, 언어공학 등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를 해 보는 것도 좋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언어학과 언어에 대한 약간의 직관적인 이해를 얻고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더없이 만족한다.


참고문헌


Hauser, M. D., Chomsky, N., & Fitch, W. T. (2002). The faculty of language: What is it, who has it, and how did it evolve? Science, 298(5598), 1569–1579. https://doi.org/10.1126/science.298.5598.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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