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앞 글에서 언어는 인간의 인지 체계 중 하나로서 규칙에 기반한 무한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리했다. 그런데 이러한 무한성은 (1편에 부분적으로 암시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유한한 단위를 기반에 두고 있다. 즉 언어는 유한한 수단을 통해 이론상 무한한 활용이 가능한 체계이다. 이 유한성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가 구별 가능한 단위로 분해되고 다시 조립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를 분절성이라 부른다.
3. 언어의 분절성
인간의 언어는 기호적, 의미적, 통사적인 단위가 나뉜다는 특성인 분절성을 가지고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장난감 블럭을 조립해서 장난감 집을 만들수도, 다시 해체할 수도 있는 것과 비슷하다. 친숙한 개념인 자음과 모음, 즉 음소가 분절성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가령 한국어 자음에는 'ㄱ, ㄴ, ㄷ, ㄹ, ㅁ, ㅂ,...', 모음으로는 'ㅏ, ㅑ, ㅓ, ㅕ, ㅗ, ㅛ...'등의 소리가 있는데 이 소리들을 활용해 한국어 문장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 언어에서 언어 취급할 소리 목록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 목록에서 벗어나는 소리는 언어적으로 유의미한 작용을 받지 못한다. 가령 'ㄹ(리을)'을 영어의 'L' 또는 'R'의 두 가지 방식으로 발음한다 해도 한국어 안에서 의미적인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말소리 리스트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로 만약 각각의 소리의 경계를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다면, 예를 들어 'ㅓ'와 'ㅝ'를 구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런 목록을 정리할 수 없다. 따라서 음소는 심리적으로 실재한다.
하나 놀라운 점은 한국어나 스페인어를 비롯한 각각의 언어가 활용하는 말소리 목록은 그 폭의 차이가 분명 있긴 하지만 활용되는 소리의 종류가 꽤 동질적이라는 것이다. 예를들어 한국어와 영어는 분명 다른 언어이고 다른 역사를 거쳤지만 가령 /ㄹ/, /ㅁ/ 혹은 /ㅋ/에 해당하는 소리를 공유한다.(/r/,/m/, /k/) 물론 두 언어에서 각 소리가 발현되는 양상은 다르지만 말소리의 공유는 언어의 보편적 특징을 부분적이나마 보여준다. 이런 보편성은 전 세계 수많은 언어를 조사해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며 학자들은 이를 통해 국제 음성 알파벳(IPA)을 만들기도 했다. IPA는 지금까지 알려진 전세계 언어의 음소 목록을 대부분 포함할 수 있다. IPA의 정립이 가능했던 것은 i)언어가 분절적 소리로 구성되며 ii)그 소리 목록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질성은 다종다양한 언어가 가진 인류적 보편성을 시사한다.
분절성은 단어와 형태소 등 좀 더 형식적인 단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Iced Coffee'를 보자. 'Iced Coffee'는 'ice + -(e)d + Coffee'로 분리할 수 있다.
Iced Coffee = ice + -(e)d + Coffee
오른쪽에 적힌 각각의 단위를 '형태소(morpheme)'라 하는데 의미를 가지는 언어의 최소단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비(rain)'는 형태소지만 'ㅂ'는 독립된 의미가 없어서 형태소가 아니다. 'Ice'는 알다시피 '얼음', '-ed'는 과거분사임을 나타내는 형태소, 'Coffee'는 '커피'를 의미한다. 이런식으로 단어는 더 작은 단위인 형태소로 이루어진다. 물론 그 자체로 단어이자 형태소인 'Coffee'와 같은 사례도 존재하지만 이는 또 다시 더 큰 단위로 조합될 수 있는 단위라는 점에서 다른 형태소와 같다.
이렇게 구성된 단어는 다시 구(phrase)로 결합되어 문장을 구성한다. 이 부분을 통사적 분절성이라 말 할 수 있을 텐데, 통사란 문장과 문장 구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The singer is my sister' 라는 문장은 우선 'the singer', 'is my sister' 로 구분되어 주부와 술부로 분석 가능하다. 그리고 각각의 부분은 다시 'the'와 'singer', 'is', 'my', 'sister'로 다시금 분해 가능하다. 물론 이는 충분한 통사적 분석은 아니지만 일단은 분절적 속성이 형태소부터 문장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언어는 내적 분절성을 가질 뿐 아니라 세계를 분절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앞선 내용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가까운 바다를 뜻하는 '연안' 과 먼 바다를 뜻하는 '원양'의 경계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가? 나름의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바다에 본질적으로 연안과 원양이 나누어져 있지는 않다. 또 '달리다'와 '걷다'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인가? 빠르기의 차이일까? 그렇다면 빨리 걷는 사람은 걷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자연과 현실 세계는 그렇게 분절적이지 않지만 언어는 이를 분절적으로 묘사함을 알 수 있다.
4. 기호의 자의성
언어를 추상적으로 정의하면 형식과 의미의 연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형식' 이라는 것은 꼭 소리나 문자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감각 가능한 기호를 거의 모두 포함한다. 예를들어 손으로 표현하는 수어(sign language)나 점자체계는 전형적인 말소리와 문자에 기반하지 않지만 모두 언어로 작동한다. 때문에 수어의 경우 일반적인 경우 말소리를 다루는 음운론(phonology)을 적용하여 분석할 수도 있다. 특정한 말소리나 손짓과 같은 기호가 특정한 의미와 연결되는 현상을 두고 '연합'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데 여기에 언어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바로 기호와 의미가 반드시 현존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야 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과'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사과'는 당연히 한국어로 /사과/에 해당하는 소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를 말하거나 들은 한국어 모어 화자는 'apple'에 해당하는 과일을 떠올릴 수 있다. 즉, '사과'의 소리(기호)와 '그 빨간 과일'(의미)이 연결된 것이다. 소쉬르(Saussure) 는 '사과'와 같이 명시적으로 인식 가능한 기호를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 그에 의해 지시되는 개념을 기의(시니피에; signifié)라고 불렀다. 소쉬르식으로 정리하면 한국어에서는 '사과'라는 기표가 '그 빨간 과일' 이라는 기의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꼭 그래야만 할까? 아니다.
만약 꼭 그래야만 하는 논리적 이유가 있다면 사과를 영어에서 'apple' 일본어에서 'リンゴ(링고)' 라고 부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한 언어 내에서도 기의와 기표의 연결 관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 이런 연결상의 무작위적 속성을 '자의성(arbitrariness)'이라고 한다.
이런 무작위성은 언어 기호의 본질적 측면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특성들을 함께 고려하면 언어는 무작위적이며 질서정연하고, 제한적이며 무한하다는 오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보편성
언어는 인류에게 보편적이다. 언어의 보편성에 대한 논거는 꽤나 단순한데 i)인류만 문법이 있는 언어를 쓰고 ii)인류 내부에는 종적으로 유의미한 유전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 근거이다. 이 논거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질문의 대상이 된 존재가 인간인지 여부이다. 만약 대상이 인간이며 환경적, 선천적 장애나 여타 성장의 어려움이 없다면 언어를 쉽게 습득하여 사용한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그 사람이 어떤 인종이든, 어떤 문화에서 자랐든 언어 능력의 보유와 발현에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로 대표되는 생성문법에서는 이런 보편적 언어가 공유하는 특질을 '보편문법(UG; Universal Grammar)'이라고 부른다. 여기엔 증거가 있을까? 꽤나 많다. 만약 너무나도 다양한 세계 각국 언어에 공통점이 없다면 문법적인 공통점이 일관적으로 나타나리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법적 분석을 해보면 품사의 존재나 주술구조의 보편성과 같은 기초적 특성은 물론 상당히 이론적인 수준에서도 각 언어가 공통점을 보인다. 심지어 '동사-주어-목적어(VSO)' 의 생소한 어순을 가지는 아일랜드어 등도 그렇다. 대표적으로 관찰된 모든 언어는 병합(Merge)이라는 원리를 통해 작은 단위를 묶어 큰 단위로 만들어 상위 문장 구성에 활용한다. 또한 이전에 설명한 분절성, 규칙성, 재귀성 등도 모두 공유한다. 이처럼 언어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시시각각 변해가지만 기저엔 모두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6. 이상하고 아름다운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기서 설명한 언어의 본질적 특성을 종합하면 상당히 미묘한 그림이 완성된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보편적이지만 또 재각기 다양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존재했던 언어들은 서로 너무나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제한적이지만 무한하다. 언어로 조립 가능한 수단이 정해져 있지만 이를 활용하면 창의적 표현이 가능하다. 또 제한된 규칙을 활용해 자유로운 언어생활이 가능하다는 점도 일견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처럼 상호모순적으로 보이는 언어의 속성은 적절한 균형 위에서 우리의 언어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학에서 언어의 형식적이고 규칙지배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특성에 집중한다. 앞서 언급한 '생성문법(generative grammar)'이 대표적인 학파로 창의적인 언어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언어 능력을 연구하는 전통이다. 물론 언어에는 이외에도 여러 측면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런 생산적, 창의적 능력에 주목한다.
인류는 언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정보를 나눌 뿐 아니라 대단히 큰 단위의 협력을 이뤄낸다. 무역이나 외교, 역사 기록이나 사회 운동 모두 언어가 없다면 성립하기 어렵거나 적어도 지금과 매우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너무나 일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이 당연한 현상은 인류에게 너무나 중추적이며 많은 독자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Ferdinand de Saussure (1959).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New York: McGraw-Hill.
International Phonetic Association. (n.d.). IPA chart. Retrieved December 23, 2024, from https://www.internationalphoneticassociation.org/content/full-ipa-c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