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문법을 아주 간단히 규정하면 규칙적 언어지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유의할 점은 문법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문법이 설명하고 있는 언어의 종류에 따른 분류, 가령 스웨덴어 문법, 영어 문법 등 뿐 아니라 그 지식체계의 속성과 지향점에 따라 여러 갈래로 분류가 가능하다. 문법의 갈래를 이해하면 다소 막연해 보이는 문법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선명히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흔히 말하는 '국어 파괴'에 대한 담론이 있다. /자장면/과 /짜장면/의 논란, '아이스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류의 높임법 논란 등 실생활과 밀접한 언어 현상은 어떤 문법을 전제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1. 처방문법과 기술문법 (Prescriptivism and Descriptivism)
문법을 두 갈래로 나눌 때 가장 보편적으로 통하는 기준이 바로 처방문법과 기술문법이다. 처방문법(presciptivism) 앞에 붙은 '처방(prescription)'이라는 말은 병원에서 의사가 내리는 처방과 같은 의미이다. 처방 문법은 우리나라의 국립국어원이나 프랑스의 아카데미아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와 같은 권위있는 기관들이 만드는 일종의 문법 지침이다. 방송에서 흔히 말하는 '바른 말 고운 말' 류의 문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하며 바람직하다 여겨지는 문법을 규정해 공표 및 홍보하는 것이다. 처방문법은 실제 언어 사용을 반영하되 어찌됐든 하나의 표준을 세운다는 특성상 직관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의 예문을 소리내어 읽어보자.
장기적인 아스피린 섭취의 효과와 부작용은 아직 논란의 대상입니다.
여기서 '효과'를 어떻게 발음했는가? 대부분은 /효ː꽈/에 가깝게 발음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운서들의 발음은 알다시피 /효ː과/에 가깝다. /효ː과/는 표준국어대사전처럼 된소리를 지양하는 '표준' 발음이다. 물론 지금은 그 사용상의 빈번함으로 인해 /효ː꽈/ 또한 표준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당 단어의 표준은 /효ː과/이다. 그런데 둘 중 대부분의 화자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발음은 /효ː과/이다.
표준 발음 외에 다른 이슈도 있다. 동사무소나 카페, 음식점 등 서비스 현장에 가면 선 어말 어미 '-시' 높임범이 다음과 같이 사용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노트북은 준비되셨는데, 태블릿은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서 '-시' 선어말어미는 어디까지나 주체를 높이는 표현으로 '노트북'과 같은 사물을 높일 수 없기에 이는 규정상 부적절한 사용이다. 따라서 처방문법에 따르면 틀린 문장이 되며 사실 후술할 기술 문법의 기준에서도 발화 오류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으로 규정된 문법을 어기는 언어사용을 두고 보통 국어가 파괴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기술문법(descriptivism)은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기록하거나 묘사하고 분석하는 접근법이다. 즉, 기술 문법은 어떤 사용이 문법적으로 틀리거나 맞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기술 문법은 대부분의 언어학적 문법이 취하는 입장으로 실제 언중이 사용하는 언어의 정체를 밝히려고 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 위의 -시 선어말어미 높임 예문는 기술문법적으로 분석해도 대부분 오류로 본다. 하지만 기술문법적 시각에서는 이를 교정하기 보다는 '혹시 -시 가 청자를 높이는 식으로 변화한 것 아닐까?' 라는 가설을 관찰자적 시각에서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러한 정신에서 기술문법은 표준어 뿐 아니라 사회 방언, 지역 방언, 혹은 격식/비격식 언어, 개인 방언에 이르는 변이를 모두 그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언어는 계속 변하며 개인의 언어 직관에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존 방식과 어긋나는 사용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2. 교육문법(pedagogical grammar)
처방문법과 기술문법의 구별 외에 교육 목적의 문법을 별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어를 배울 때 마주치는 교재상의 문법이 교육적 문법의 일종이다. 학습자나 교사를 위한 문법은 언어 학습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충족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 문법은 언어에 대한 사실적인 분석에 더해 학습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추가로 고려한다. 대표적으로 (물론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익숙할 5형식 기반 문법이 있다.
다만 학습 효과성과 효율성을 위해 문법이 언어적 사실과 매우 동떨어지게 가공된 경우 학습자가 고급 수준에 도달하고 실제 언어를 사용할 때 오히려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언어 학습의 기반이 된 문법이 틀렸다는 것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 문법 또한 기술적 충실성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교육 문법과 언어학적 문법, 기술 문법 사이에 다리가 되는 문법으로 참조 문법(Reference Grammar)이 설정되기도 한다 (엄태경 2016). 참조 문법서를 기준으로 삼아 실용적인 목적에서 조직된 문법, 교재, 수업 자료 등을 평가하고 개선할 수 있다.
이렇게 기준으로 삼는 상황과 문법의 종류가 무엇인지에 따라 같은 문법, 표현을 두고도 판단이 달리질 수 있다. 가령 초급 영어 교실에서 과도하게 세분화된 문법을 사용하거나 굳이 규범이 필요 없는 곳에 규정을 들이 밀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언어학적 문법을 전제하기에 기술 문법의 시각을 주로 채택한다는 점을 말해둔다.
참고문헌
엄태경. (2016). 영문법 학습 교재의 5문형 분류 체계.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6(6), 283-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