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Dottie Kim 글 : Mama Lee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수술 후 의식이 없을 테니, 당연히 아빠를 제일 처음 보게 되고, 아빠 품에 제일 먼저 안기게 될 테니까.
아름다운 비행이라는 영화가 있다. 습지에서 데려온 엄마 잃은 거위 알을 부화를 시켰더니, 거위들이 주인공 어린이를 엄마처럼 따르게 되었고, 주인공은 기꺼이 거위 엄마가 돼서, 거위에게 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주를 위한 장거리 비행을 성공시킨다는 멋진 이야기.
딸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으면 10의 9.9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라 대답했다. 아빠처럼 곁을 지켜주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는 것처럼.
몇까지 기억이 있다.
출장이 잦았던 탓에, 집을 떠나는 일이 많았고, 아이는 매번 “싫어, 가지 마” 하면서 울고 “엄마 미워”하면서 울었다.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붙잡아도, 아이를 떼어 놓고 출장을 가야만 했고, 아이는 엉엉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거나, “더더더 미워” “더더더더더 미워” 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사랑해. 두 밤만 자고 올게” 이렇게 답을 해도 “더더더더더더 미워” 라며 서러움을 표했다.
금방 다시 만날 것을 알지만 엄마와의 이별은 언제나 서럽고 슬펐고,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픔이었다.
다섯 살 즈음에는 출장 전날, 이별의 아픔이 온몸에 빨간 두드러기를 만들어서 머릿속에서 발끝까지 부풀어 올랐었다.
열이 38도 39도를 오르락내리락하여 밤새 엄마, 아빠의 마음을 졸이게 했고, 날이 밝자마자 달려간 병원에서 엄청난 소리로 울면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온몸을 얼룩덜룩 부풀게 했던 두드러기는 가라 않았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여전해서, 주사처럼 온몸을 콕콕 찔렀고, 아이는 많이 울었었다.
초등학생이 되고, 학원을 가고 나름대로의 스케줄로 종일 바쁘게 지내면서도 엄마의 부재는 여전히 아이에게는 아픔이었다.
다만 슬픔을 발진으로, 울음으로 표현하기보다, 참아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스킬이 생겼다.
엄마는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동안의 슬픔을 상쇄시킬 만큼 즐겁고 신기한 것들을 가져왔다.
그림책, 장난감, 과자,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옷, 인형 등등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은 낯선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기는 먹거리였다.
입에 넣기만 하면 바사삭 부서지는 홍콩 제니 쿠키, 달콤하고 폭신한 일본 도쿄 바나나, 잔디 머리 아기가 그려진 구수한 중국 왕왕 쌀과자, 달콤하고 찐득한 싱가포르 가야 쨈, 새콤 달콤한 소스와 국수가 들어있는 태국 팟타이 밀키트, 입안 전체를 코팅하는 부드러운 프랑스 에쉬레 버터와 큼직하고 꿈꿈 한 브리 치즈, 젤리보다 쫄깃하고, 떡보다 딱딱한 터키쉬 딜라잇.
이별의 시간은 슬프지만, 혀를 감쌀 맛을 상상하면 하루 이틀쯤 기다릴 수 있었고, 어떤 때는 과자가 먹고 싶어서, 엄마가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다녀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사람의 빈자리가 달콤한 맛으로 채워진다는 것이 재미났다.
더 많은 선물, 더 많은 맛을 얻기 위해 엄마와 아이는 신중하게 협상했다.
슬픔이 설렘, 기다림으로 바뀌는 기간을 미리 정하면 불안하지 않고, 참을 만 해졌다.
엄마는 매번 “우리 딸이 제일 중요해.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 하고 말했지만, 떠났고 또 돌아왔다.
함께 해도 엄마의 존재를 100% 곁에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맛난 과자를 많이 먹어도 허기를 느끼던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안아줘”, “꼭 안아줘” 하며 그리움의 시간을 채우려 애썼다.
아이가 초등학생 때, 보석처럼 파랗게 빛나는 바다로 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커다란 그늘 아래 썬 베드에 누워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고, 썬 크림을 서로 발라주며 바다를 들락날락 하면서 쉬고 있었다.
뭔가 급한 일이 있었는지, 여유로운 여행 중에도 엄마는 태블릿을 꺼내서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잔뜩 집중하면서, 메일을 보고, 답변을 하고, 행여 모래나 바닷물방울이 튀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아이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볼을 부비기도 했다.
그 순간 “엄마는 바다를 컴퓨터로 보는구나” 하고 아이가 말했다.
거대한 바다를 앞에 두고도 고개를 들어 온전히 푸르름을 즐기지 못하고, 손바닥 만한 태블릿을 쳐다보는 엄마가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아니야. 그냥 급한 메일 하나만 확인했어. 이제 우리 실컷 놀자” 라며 태블릿을 종료시켰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그날의 엄마를 떠올렸다.
파란 하늘과 바다,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 그리고 사원증에 매달려 있던 엄마의 모습을 그리니 Workcation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Work + Vacation 일하면서 쉰다는 단어. 상반되는 두 단어를 붙여서 하나로 만들다니 사기꾼 같다.
어쩌면 Workcation은 Work + Cage + Action 이 아닐까.
일이라는 케이지에 감금하고,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게 잡아 두자는 음모를 발견한 느낌이다.
엄마도 언젠가 work와 vacation을 캐주얼하게 즐기거나, 아예 work와 vacation을 분리해서 즐기게 될지 않을까?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이 있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소보로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아픈 경험은 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가진 치유의 힘이란 이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