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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N-jober

그림 : Dottie Kim 글 : Mama Lee

by kimleekim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아빠 엄마의 일 순위가 아닌 것이, 서러웠던 기억이 있다.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회사에 가야 하고, 출장을 가야 하고, 음식을 해야 하고, 청소해야 운동을 해야 하고, 친구를 만나야 하고, 피곤하기 때문에 그 밖에도 수많은 이유로, 순위가 뒤로 밀린다는 것이 서글펐다.

하나의 개인에게 많은 상황과 역할이 주어지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그때 나를 안아주고 설명해 주시던 아빠,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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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라는 말처럼 엄마 아빠는 바빴고, 기억하는 많은 시간을 이모님들이 나를 돌봐주셨다.

15개월까지 주중에는 외할머님이 계셨고, 15개월부터 6살까지는 엄마 회사 어린이집, 7살에는 유치원 종일 반을 다녔다. 이 무렵 대부분은 엄마랑 등원 하원을 같이 했지만, 엄마가 출장을 가면 외할머님과 아빠가 함께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종일 혹은 오후에 이모님이 계셨다.


넘치도록 사랑해 주시는 아빠, 외할머님, 이모님이 보호자로 홀로 있는 시간 없이 나를 지켜 주셨지만, 엄마가 없는 시간 특히 출장을 가시는 시간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다섯 살 때쯤은 분리 불안에 대한 스트레스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고, 울며 떼쓰기도 했고, “엄마 미워, 더더더더 미워” 이런 카톡 메시지를 보내서, 엄마의 마음을 슬프게 하기도 했다.


아빠는 정확한 시간에 정해진 일정을 루틴처럼 지키셨다. 애교를 부리거나, 칭얼거려도 출근과 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간혹 아빠를 보고 싶으면 엄마를 졸라, 운동이 끝날 때쯤 헬스클럽 입구에서 아빠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내부를 힐끗거리다, 아빠랑 눈이 마주치던 기쁨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놀이동산에 갔던 것은 기억에도 사진으로도 딱 한 번뿐이다.

표범 무늬의 큰 귀가 붙어 있는 머리띠를 하고, 핼러윈 장식을 한 에버랜드였다. 사파리 버스를 타고 뿔이 두 개 달린 기린이 창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인사하는 것을 보았고, 곰이 네발로 걷다가 두 발을 딛고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할머님, 할아버님이 편찮으셨기 때문에, 매주 할머니 댁에 갔었기 때문에, 친구들처럼 여기저기 놀러 다니지는 못했지만, 1년에 한 번은 여행을 갔었고, 여행을 가는 것은 24시간 엄마 아빠를 독점하는 것이라 정말 신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나에게는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고, 아쉽기만 했었다.


중학생이 되자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재미나졌다. 남들의 주목받는 것을 매우 꺼리는 나는 친한 친구들과는 함께 할 때는 한껏 들뜬 마음이 돼서, 과하게 명랑해지곤 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에게 “지인 관종”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중학생 때부터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문의 열고 세상에 한쪽 발을 딛게 되었다.

엄마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인 나, 돌출 행동 없이 조용한 나, 간혹 학원 수업을 빠지지만 비교적 성실한 나, 과외 선생님께 짜증 내는 나, 친한 친구들에게만 보이는 나.

중학생이 되자 나에게는 다양한 얼굴이 생겼고, 동시에 몇 가지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먹고사는 일을 하는 건은 아니지만 중학생 삶도 매우 바쁘고 분주했다.


한 가지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과 감정이 생길 때가 있고, 다양한 상황에 동시에 존재하며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의지와 신념과 상관없이 주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분신술을 하는 손오공처럼 필요할 때마다 몸이 몇 개쯤 생겼으면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당장의 역할을 해야 할 상황이 있는 것이지, 마음속의 1 순위, 2순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사회적인 역할이 있는 삶이란 때론 동시다발로 존재하지 못하는 슬픔과 아픔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나도 엄마처럼, 아빠처럼 다양한 역할을 하는 N-jober가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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