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티카 Stica Nov 10. 2023

디지털 노마드 행세

언제라도 편안한 치앙마이에서

아무런 계획도 필요하지 않은 곳, 그러나 언제 가더라도 편안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도시. 치앙마이에 왔다.


수하물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달 짐을 위탁수하물 15kg와 기내수하물 10kg로 나눠 담았다. 최소한 필요한 것들만 추린다고 추려 넣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무게가 차는지 의아한 일이었다.


내가 탄 제주항공의 비행편 탑승구는 130번 게이트. 탑승동까지 가야하는군. 혹시나 몰라 백수가 되기 직전 재발급해놓은 PP카드를 들고 탑승동 스카이허브 라운지로 향했다. 터미널에 있는 라운지들처럼 음식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훨씬 덜 붐비고 조용했다. 치킨양념을 입힌 치킨텐더와 소시지야채볶음 맛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이것저것 먹어치운 뒤에는 스팀밀크와 홍차티백으로 밀크티를 만들어 마셨다. 비행기에서 볼 영화와 드라마를 아이패드에 다운받아볼까. 넷플릭스를 열어보니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완결편의 하편이 드디어 나왔다! 이삼일 뒤 치앙마이에서 재회할 남편을 기다렸다 함께 봐야 하려나, 약 십초간 고민 후 <진격의 거인> 저장 버튼을 눌렀다. 집에서 끝까지 다 못 보았던 케이트 블란쳇 주연 영화 <Tar>도 같이 다운받아두었다.


화요일이고 연휴가 끼어 있지 않아 그런지 공항과 라운지가 대체적으로 한산한 편이었는데, 예상외로 비행기는 만석인 것 같았다. 내 경우 최대 6시간 정도까지는 화장실을 포기하고 (화장실 가는 사람 길 비켜줄 일 없이) 맘 편히 자는 것을 선호하므로 창가에 앉았다. 비행 소요시간은 6시간 30분. 진격의 거인을 다 보고 Tar도 보고 책도 보다 잠에도 들었다가 하니, 그새 어렵지 않게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했다.


원래 이렇게 빨랐던가. 치앙마이 공항 도착 후 모든 수속이 빨랐다. (아마 동일시간대 도착편이 많지 않은지도). 입국심사도 빨리 끝났고, 위탁수하물도 빨리 나왔다. 게다가 치앙마이 공항 택시 카운터에서 도착지를 알려주니 택시도 빠르게 잡혔다. 어지간해서는 시내까지 모두 150밧이면 가는지, 아주 큰 글자로 To Downtown 150 THB (약 5500 KRW)라고 쓰여 있었다. 블로그에서 그 가격이 그랩보다 싸다는 걸 봤던터라, 곧장 카운터로 가서 숙소 이름과 주소를 보여주고 택시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았다. 치앙마이 공항에서 시내가 이렇게 가까웠는지도 잊고 있었다. 이건 뭐,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마음이 푸근한데.


공항을 나서 택시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의 태국어 문자가 새삼 신기하다. 내가 외국에 오기는 왔구나. 반나절 비행기를 타고도, 본국을 이역만리 떠나왔다는 실감이 잘 안나는 것이다. 수개월씩 배를 타고 여행하던 때는 달랐으려나. 십여분만에 에어비앤비로 한달을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밤 11시, 깜깜한 골목이라 어디가 정문인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내게 카드키를 전달해줄) 경비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제야 조금 긴장이 된다. 짐짝 두개를 들고 서성이다보니, 그제야 건물 왼편에 불이 들어온 작은 사무실 같은 곳이 눈에 띈다. 생각보다 젊은 경비가 영어는 전혀 할줄 모르는 듯 일단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 적막한 한밤중 공기에 괜스레 목덜미가 서늘하다. 천천히 다가가 에어비앤비에서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메세지를 여러개 그에게 보여주니, 그제야 카드키를 건네준다. 자세히 보니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인상이 좋은 사람이다. 컵쿤카, 인사를 남기고 건물 대문을 열었다.


내가 한 달을 살아야 할 방은 생각보다 아주 좁다. 침대와 작은 소파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가져온 요가매트를 깔 자리조차 마땅치 않아보인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도 좀 난다. 여기를 165만원이나 주고 예약했다고? 콘도를 찾아다니며 직접 예약하면, 저렴한 지역(싼티탐)의 경우 50만원도 안하는 데가 꽤 있어보이던데. 성수기라 빈 방이 없을까 싶어, 이왕 노는거 좀 더 마음 편하자고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한데다, 스쿠터를 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필요한 시설(이라기보다는 카페)들로의 접근성이 좋은 님만해민 한가운데 숙소를 정한 터. 어느 정도의 가격대는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좀 상태가 너무한데. 그래도 늦은 시간에 도착해 물도 못 사마시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던 내게 냉장고에 들어 있는 1.5L 생명수는 몹시 반갑게 느껴졌다. 뜯지 않은 여섯병들이도 냉장고 옆에 놓여 있다. 집주인이 맘씨는 넉넉하시네.


한국시간으로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지만 보통 이 시각에 남편은 안 자므로,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안전히 도착했음을 알린다. 숙소를 대충 보여주니, 집 소파 위에 누워있던 남편이 고양이를 끌어안고 난데없이 고양이를 자랑한다. 핸드폰 화면으로 보니 고양이가 실제로 볼 때보다 더 인형같이 예뻐보이는건 왜일까. 자려고 누웠지만 비행기에서 너무 잔 탓인지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킨들을 꺼내 읽는다. 읽기 시작한 후 일 년이 넘게 지나도록 진도가 34%에 불과한 <모스크바의 신사>. 역시 책을 읽기 시작하니 소로록 잠이 찾아온다.




새벽에 서너 번 깼다. 숙소 후기에서 비행기 소음이 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정말이었다. 그 소리 때문에 깬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야심한 시각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비행기 소음에 앞날이 조금 걱정된다. 충분히 자야한다는 생각으로, 깰 때마다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잠을 청했다.


7시가 넘어 일어나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선크림을 열심히 바르고 가방을 챙겼다. 노트북이며 킨들이며 고프로까지 챙기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보면 정말 디지털 노마드인줄 알겠네. 어쩌면 나는 지금 나도 모르게 디지털 노마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인가? 놀고 있을 뿐이면서, 진지하게 뭔가를 하는 척 하려는건 아닐까? 그러나 곧, 진짜이면 어떻고 가짜이면 어떤가 싶다. 이왕 노는거 나 좋은대로 하면 되지. 하물며 디지털 노마드 공인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가려던 카페는 Morestto라는 곳이었는데, 집에서 구글맵으로 찾았을 때는 걸어서 3분거리라기에 노트북을 들쳐메고 가 앉아 있기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집 건물을 나와 다시 검색하니 8분이 나와 단번에 포기한다. 대신 4분거리인 Ristr8to로 향한다. 2016년 처음 혼자서 치앙마이를 왔을 때 하루에도 몇번씩 왔던 카페다. 당시 리스트레토로 추출해 만든 커피를 많이 먹어보지 못했던 내게, 여기서 마셔본 리스트레토 커피 음료들은 신세계와도 같았다. Ristr8to의 시그니처 메뉴인 Cigaretto도 맛있지만 Cortado나 Gibraltar도 맛있다. 모두 리스트레토 더블샷이 들어가고, 우유 양이 적은 커피들이다.


작년에 왔을때, 가까운 곳에 Roast8ry Lab이라는 곳이 생겼길래 가봤었다. 그곳도 커피가 참 맛있지만, 거리가 좀 더 멀기도 하고 오래 앉아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Roast8ry Lab이 Ristr8to를 고급화한 버전인가 생각했는데 (영어대문자 R과 숫자8로 조합된 로고가 거의 똑같다고 할 만큼 비슷하다), 두 가게간에 다른 한 쪽을 조금도 홍보하지 않는 걸 보면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Ristr8to에서 독립해 나온 바리스타가 차린게 Roast8ry Lab이라던지. 그런데 아무런 지배관계도 없다면 로고가 그렇게까지 유사해도 되는건가? 생각하다보면, 장사 잘 되는 남의 가게 걱정 말고 본인이나 걱정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9월말에 편집을 다 마쳐놓고, 렌더링을 하던 중 에러가 나버리는 바람에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 안탈리아 영상을 다시 편집하기 시작한다. 같은 작업을 도무지 반복하고 싶지 않아 '파이널컷 프로젝트 복구'만 이삼일을 연구했더랬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다시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이쯤에서 유튜브를 그만두게 되겠다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 하다 마는 것은 영 기분이 찝찝한 일.


이제는 제대로 마무리해보자, 가짜 디지털 노마드이기는 하지만.


시가레토 (Cigaretto 88 THB), 오트밀트로 변경 (+10 THB), 디카페인 변경에는 추가금액이 없어 총 98 THB (약 3600 KRW)


지브랄터 (Gibraltar 88 THB), 오트밀트로 변경 (+10 THB), 디카페인 변경에는 추가금액이 없어 총 98 THB (약 3600 KRW)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