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아래에 소개해드릴 곡과연주자들은 어떤 음악이 명곡이고 누가 진정한 아티스트인지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세대를 뛰어 넘어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노래들, 장르를 대표하는 곡들은 멋진 수식어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곡을 만들고 연주하는 뮤지션들은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아 노래와 연주를 합니다. 이들은 어느새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합니다.
로버타 플랙
1937년 북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로버타 플랙은 싱어송라이터로 소울과 R&B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플랙은 컨템포러리 R&B의 하위 장르인 콰이어트 스톰에 영향을 끼쳤고 국내에서도 그의 음악은 1970~80년대 라디오를 강타하였습니다. 1983년 발표한 피보 브라이슨과의 듀엣 곡 "Tonight, I Celebrate My Love"는 팝송을 좋아하는 중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73년에는 플랙의 시그니처 곡인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이 발표되었습니다.
플랙의 프로 경력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고1969년 앨범 <First Take>로데뷔합니다.
1969년 데뷔 앨범 <First Take>
이 앨범에는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과 더불어 플랙을 대표하는 곡 "The First Time I Saw Your Face"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플랙은 피아노와 보컬을 맡고 있고 기타, 베이스, 드럼 등의 리듬 섹션에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 등 재즈의 중심이 되는 혼 섹션과 스트링이 추가되어 소울, R&B를 유지하면서 재즈로의 확장을 꾀하고 있습니다. 앨범 커버를 보면 피아노 앞에 앉은 로버타 플랙, 베이스의 론 카터, 드럼의 레이 루카스가 보입니다. 전형적인 재즈 트리오의 모습이지요? 플랙은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합니다. 총 여덟 곡으로 구성된 이 앨범의 마지막 곡이 소개해드릴 "Ballard of the Sad Young Men"입니다.
Ballard of the Sad Young Men
오랫동안 음악적 파트너를 유지한 프랜 랜데스만과 토미 울프가 협력하여 만든 곡입니다. 가사는 슬픈 청년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머리에 꽃을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청년들
흑인 인권의 대두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
히피 그리고 비트 세대
워터게이트 사건 등
바에서 들이키는 싸구려 위스키가 이들의 애환을 달랩니다. 이들은 현실에서의 도피를 상상하며 늙어갑니다.
1969년 6월 발표한 이 곡은 55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가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화됩니다. 그렇다고 노래가 우울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져있거나 치기어린 젊은이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사의 완성도와 연주가 뛰어납니다. 녹음 당시 32세였던 플랙으로서는 가사의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플랙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과 동일하였을 겁니다.
1970년 라이브 앨범 <Boboquivari>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플랙은 KCET 티브이가 기획한 음악 프로그램 보보퀴바리에 출연하게 됩니다. 1970년 스튜디오에서 실황으로 녹음하였고 이듬해인 1971년 8월 미 전역에 중계되었습니다. 사진이 그 라이브 앨범으로 총 5곡이 수록된 EP 판입니다. 그의 라이브 연주와 노래도 뛰어납니다.
"Ballard of the Sad Young Men"이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지난 1989년 가을.
유럽 투어 공연을 펼치던 재즈 트리오가 있었습니다.
1989년 키스 자렛 트리오 <Tribute>
1989년 10월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은 그의 스탠더즈 트리오와 함께 유럽 투어 공연을 열네 차례에 걸쳐 진행합니다. 특히 독일에서 여섯 번의 공연을 소화하였고쾰른 필하모니 실황은 <Tribute>라는 두 장의 LP로 발매됩니다.
쾰른은 자렛이 재즈 솔로 피아노의 신기원을 이룩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솔로가 아닌 트리오로 다시 찾은 곳에서 스탠더즈 트리오는 열 명의 재즈 거장들을 위하여 열 곡의 스탠더드를 연주합니다. 특히 "Ballard of the Sad Young Men"은 재즈 보컬리스트 아니타 오데이의 오마주입니다.
자렛의 솔로 피아노와 트리오에서 보여주는 피아노 연주는 다릅니다. 솔로에서 펼치는 즉흥연주와 달리 트리오에서는 다양한 스탠더드 곡을 선정하여 동료인 게리 피콕(베이스), 잭 디조넷(드럼)과 합을 맞추는 형식입니다. 스탠더드 곡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리며 세 명의 앙상블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합니다. 자렛의 연주는1960년대를 이끈 빌 에반스의 연주를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에반스와 그의 트리오도 스탠더드 연주를 많이 하였습니다. 자렛의 절제된 연주와 피아니시즘은 그의 콧노래가 가미되면서 에반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렛화됩니다.
피콕의 베이스 워킹은 인상적입니다. 그만큼 연주와 녹음이 잘 된 것이기도 한데 자렛의 유러피언 트리오에서 보여준 키스 자렛과 얀 가르바레크의 회화적인 이미지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키스 자렛과 게리 피콕의 인터플레이가 뛰어납니다. 또한 이 두 명의 앙상블을 받쳐주는 디조넷의 드러밍은 간결하고 부드럽게 전개됩니다. 브러시, 스틱, 발을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드럼과 심벌을 무심하게 두드립니다.
이 세 명의 절제 미학은 로버타 플랙이 노래로 들려준 슬픈 청년들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승화시킵니다. 가사에서 표현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리듬 섹션 트리오의 연주와 함께 우리 마음을 휘젓습니다.
참고: 마르친 바실레프스키 트리오의 2011년 앨범 <Faithful>에 수록된 연주도 꼭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