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아빠로 곁에 있고 싶어

by 마리

남편은 날카롭게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를 내밀 듯 담담하게 말이 나왔다.


“당신 항암 안 받으면 3개월, 항암 받으면 1년 산대.”


금방이라도 끓어넘칠 것 같은 공기가 가스불을 끈 듯이 식었다.

남편은 오히려 큰일이 있을 때 냉정해지는 타입이다.

이것이 우리 부부가 유일하게 닮은 점이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는 네가 죽을 것 같지가 않아.”

“물론, 지금 일어날 수도 없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신경을 누르는 암세포만 제거되면 고통은 완화될 테고.”

“지금 당신을 봐. 누워있는 것 말고 누가 당신을 아픈 사람이라고 하겠어?”

“위암 4기 5년 생존율이 4% 라는데, 4%가 적어?”

“적지 않지.”

남편이 맞장구를 친다.

“로또 1등 당첨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높은 확률이지.”

“그렇지.”

“그런데, 항암은 몹시 고통스러울 거야. 그건 당신이 혼자 견뎌내야 해. 할 수 있겠어?”


남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 눈을 바라보며,

“병원에 있는 며칠간 지나온 삶에 대해 생각해 봤어.”

“나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 딱히 고통받아 가면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싶지는 않아.”

“삶에 미련은 없어.”

“하지만, 설이아빠로 곁에 있고 싶어.”

남편의 눈동자가 마치 달빛이 바다에 비친 것처럼 반짝반짝 잔물결을 일으킨다.


다음날 아침 우린 전사가 되어있었다.

어제와 같은 전쟁 같은 밤을 보냈지만, 우리는 비장했다.

8시 반 어김없이 병실 앞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상호 환자분.”

권교수님은 남편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본 후, 시선은 어깨에 둔 채.

“어제 위 내시경을 통해 여려 군데에서 조직을 채취해 조직검사를 했어요.”

“암세포가 나오긴 했는데, 세포의 형태가 불분명해서 염색을 했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환자분은 위암에서 시작된 암이 뼈로 전이된 것입니다.”

“4기 위암 뼈전이입니다.”

권교수님은 본인의 핸드폰 화면에 뼈사진을 띄운 후 상체를 틀고 무릎을 굽혀 남편 눈높이에 맞췄다.

설명을 이어갔고, 바지 주머니에서 가위로 손바닥 만하게 자른 이면지를 꺼내 어려운 단어를 적고, 세포의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남편은 ‘이해했습니다'라고 말했다.

30분은 족히 흘렀으리라.

교수님은 자세를 고쳐 바르게 몸을 일으킨 후 나를 바라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복도로 나갔다.

주치의와 인턴 몇 명이 교수님을 따라나섰다.

나도 잰걸음으로 교수님을 따라 복도로 나갔다.

“선생님!”

권교수님이 뒤를 돌아봤다.

“선생님, 저희 항암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벌써 환자분과 상의 하신 건가요?”

“네.”

“환자분은… 암 중에서도 반응성이 안 좋습니다. Her2 음성이라 표적항암제를 쓰기 어려워요.”

“PD-L1 단백질도 적어 표준 항암제를 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혹시 비급여 항암제 중 남편에게 효과적인 것은 없나요?”

“면역항암제 옵디보주를 표준항암제와 함께 사용하면 효과가 10~20%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비용이 좀… 원무과에 문의해 보셔야 하겠지만, 1회당 4백만 원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이 흑색종 진단을 받았고, 간에 이어 뇌까지 전이 됐었다.

그가 면역치료제 키트루다로 치료하고 완치되었다는 뉴스를 읽고 남편에게 효과적인 면역항암제가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드라마틱한 효과는 아니지만, 1%라도 더 치료효과가 있다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 저희 실비보험 있어요. 남편한테 좋은 것이 있다면 다 해주세요.”

“일단, 옵디보주 추가해서 시작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2009년 결혼 전 큰 형님의 권유로 실비보험에 가입했다.

마지막 1세대 보험으로 자기 부담금이 없다고 강력하게 추천했었다.

실비보험이 뭔지, 자기 부담금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큰 형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가입했다.

월 납입금이 상호 씨에게 정확히 부담가지 않을 정도 이기도 했다.

형님의 정보력, 정확한 일처리, 꼼꼼한 마무리.

내가 유일하게 ‘콩을 메주로 쒔다.' 해도 믿을 사람이다.

전업 주부가 아니었다면 회사 조직에서 크게 성공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시, 형님의 선견지명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정말 듣고 싶은 얘기는 듣지 못했다.

“선생님, 그런데 상호 씨 척추에 있는 종양 제거 수술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정형외과 수술이 새벽부터 자정까지 꽉 차 있네요. 일단 메일을 보냈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상호 씨가 너무 힘들어해요.”

“다시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창 밖으로 붉게 노을이 지고 있다.

병원 복도를 물들인 뜨거운 오렌지 빛이 내 몸을 날카롭게 관통하는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를 고통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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