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주근깨 투성이의 갸름한 얼굴, 삐죽삐죽한 앞머리를 가진 말라깽이 작은 소녀 빨강머리 앤. 영원히 자라지 않을 116살의 그 소녀는 내가 어른이 되려는 순간에 뛰어들어 재잘대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서정시를 가득 담은 초롱초롱한 파랑 눈이 깜빡이면 나는 앤의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다락방에 오르면 거친 느낌의 목재책상 앞에 앉은 앤이 땡그란 눈에 생기를 번뜩이며 소녀의 울림을 시로 지어내고 있다. 다락방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들바람, 좁은 공간의 비밀스러운 속삭임, 작은 침대 위의 낮잠. 어릴 적 내가 숨어들었던 우리 집 다락방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 집은 단층집이었다. 나지막한 지붕아래 방 세 개 거실(마루), 안방과 연결된 작은 부엌. 월세살이 하던 우리 가족이 처음 매매로 들어갔던 집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안방에는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다락방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이다. 앤의 공간처럼 환한 들녘이 보이는 곳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곳을 사랑했다. 어느 날 언니가 나를 다리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려서 온 동네를 다니며 엄마를 불러대던 때에도 마지막에 숨어들었던 곳은 다락방이었다.
겁이 많은 내가 신기하게도 그곳은 어두워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엄마의 자궁처럼 안락하고 포근하고 안전한 곳으로 느꼈던 거 같다. 언니의 놀림으로 저녁 늦게까지 밖을 헤매다가 들어와 다락방에 있었는데 잠들었다가 깨어나 안방으로 내려오니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슬펐는데... 얼마 전에 동생과 옛날이야기를 나누다가 듣게 되었다. 가족들은 내가 그곳에서 자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고.
다락방은 내게 앤 이고 쉘터이고 어린 시절이고 타투처럼 가슴에 새겨진 낭만이다.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유일한 공간. 그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싶어질 듯하다. 그리움의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