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이 글의 제목에서 '초상'은 그 해 가을에 처음으로 내리는 서리라는 뜻이다. 이 책은 스물아홉 살이 된 남자가 스물한 살의 추억을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나는 지금 책에서 언급된 비치보이즈의 캘리포니아 걸즈를 듣고 있다. 나는 책 속에 등장하는 데릭 하트필드의 책을 읽고 싶어서 중간에 교보문고를 뒤졌고, 페이지 62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언급할 때는 그 곡을 플레이하며 책을 읽었다.
끊어지는 문장, 두서없는 듯한 짤막한 말들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데릭 하트필드의 책과 그 음악들을 스토리 속에 넣은 이유와 감각을 느껴보는 것. 안타깝게도 데릭 하트필드의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데릭은 실제로 존재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미국 작가였다. 놀라운 사실은 가상의 이 작가는 이 책에서 꽤 무게감이 있다. 이 가상의 작가는 이야기가 진중하게 흘러가게 했다. 책 속에 있는 작가의 책까지 열심히 찾아보게 했으니 이 소설은 이미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책에는 '나'와 '쥐'와 제이슨 바 그리고, 그 바의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왼쪽 새끼손가락이 없다. 여자의 손에서 새끼손가락을 제거한 것은 단지 특정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의미를 그 새끼손가락에 부여했을 수도 있다. 쥐는 부유한 집 사람이지만 부를 혐오한다.
"부자 놈들은 모두 엿이나 먹어라." P.16
세 사람에는 공통점이 없다. 오히려, 너무 달라서 어디에서도 마주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다. 부자이지만 부자임을 탐탁해하지 않는 쥐와, 도쿄에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과 불행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 연상의,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
스토리는 불쑥불쑥 나타나는 여자와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제이스바가 전부이다. 제이스바는 유일하게 그들을 엮어주는 공간이다.
감탄하고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력이다. 어느 문학상을 탔고 안 탔고의 문제가 뭐가 중요할까. 처녀작인 이 책의 문장에 빠져 허우적 대다가 꼬르륵 숨이 멎어 버릴지도 모르는 것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하게 만들어졌다는군." P. 28
그러니 어쩌겠는가. 포기하겠는가. 열병에 빠져 나도 나의 글을 계속 써나가겠는가. 글에 대한 집착을 더욱 고착시켜 주는 책이다.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 P.91
내가 작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책 속에 등장한 비치보이즈의 노래를 듣다가 나의 노래를 찾았다.
우든 비 나이스.
책이란 이러해야 한다. 깨달음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도와야 하며, 알려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닌 알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혹평을 받기도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거친 구조속에 가난한 문장이 부유하게 빛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