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상황 역시 제본 때문에 생겼다. 제본에 관한 일은 세세하게 살펴야 하고 책이나 글에 민감한 분들의 소중한 자료이기에 예민하다. 그래서 피곤한 일이다. 신경 쓰이는 일인 만큼 응대하는 것도 두 배로 힘들다.
그날 아침에도 어느 50~60대 중년의 여성고객님의 제본의뢰로 시작되었다. 6권의 출력물을 링제본으로 해달라는 요구셨다. 당장 해달라는 요청이셨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본이라는 것만 하면 몰라도 문구점에는 다른 자잘한 일들이 많다. 접수를 받고 최대한 신속하게 해 드리겠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완성 후 연락을 드려야 한다. 손님도 마음이 바쁘셨는지 제본의 위치를 헷갈려하셨다. 제본방향의 중요성을 아는 나는 한 권씩 방향을 물었고 그대로 제본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두 시간 뒤 완성된 제본을 손님에게 전하고 한 시간 뒤 연락이 받았다.
"제본 방향이 이상해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데. 그쪽에서 잘못한 거 아니에요?"
"예? 제본은 한 권씩 주시는 데로 들어갔을 텐데요."
"아닌데 그쪽에서 잘 못했어요. 3권은 맞는데 3권은 잘못됐어. 이거 어쩔 거야."
잘못된 제본 방향으로 화가 나신 손님은 매장으로 계속 전화하셨고 계속 매장의 잘못만 강조하신 채 화를 내셨다.
"손님! 죄송하지만 가지고 오시면 다시 해 드릴게요."
제본이 잘못됐다는 전화에 다시 해 드리는 방법을 선택했고 방문한 손님은 계속해서 불만을 말씀하셨다.
"나는 똑바로 줬는데 왜 내가 잘못 줬다고 하는 거야. 여기서 잘 못 했잖아."
"손님! 계속해서 말씀드리는데 잘 주셨는지 잘 못 주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어요. 그리고 손님이 잘 못 주셨는지 저희가 잘 못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내가 잘 못 줬다는 거야? 내가 이 매장에서 제본을 몇 번이나 했는데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그래서 다시 해 드리잖아요. 누가 손님이 잘 못 주셨다고 합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죄송하다고 말했어야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몇 번을 더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려야 화가 풀리실까요?"
그러면서 그 손님은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조용한 분위기에 갑작스러운 손님의 행동은 하던 일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손님의 눈빛에 지지 않으려 나 또한 손님의 눈동자를 계속 쳐다봤다. 차분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손님의 눈동자가 살짝 움찔했고 다른 곳을 쳐다본 순간을 포착했다.
그 순간 '됐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 풀 꺾이며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의 손님에게 말했다.
"저 자료가 중요한 자료인가 봐요. 영어로 되어 있던데 뭘 배우세요?"
"아! 이 나이에 영어 좀 배워보려고 학교를 다니는데 그 자료예요."
"어머! 그러시구나. 멋지시네요. 영어를 배우시다니. 영어 배워서 어디 여행 가시려고요?"
라며 화젯거리를 돌렸다. 기싸움에서 이긴 여유로 난리를 쳤던 여성 손님과 차분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무작정 화를 내서 미안해요. 말씀대로 내가 잘 못 줬을 수도 있는데 마음이 바빠서 그만 화를 냈네요."
"아니에요. 그럴 수 있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본이라는 게요 좀 그래요. 앞으로는 여유롭게 맡겨주세요. 제본 방향도 표시해 주시고요."
호랑이 같던 손님을 순한 고양이로 만들어 보내드렸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 갈등상황은 많지 않았지만 저 일은 나에게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내 마음의 여유로움과 에너지로 갈등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으니까. 그리고 내 내면에 자리한 큰 에너지를 느끼며 자심감까지 얻었다.
직원과의 갈등, 나와의 갈등, 손님과의 갈등 그 모두가 쉽지 않다. 매번 씩씩하게 대처하며 상황을 종료시키지만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갈등 속에 지칠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냉정해지고 담백해지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차분해 지려한다. 남아 있는 감정들은 긍정의 주문으로 희석시키는 발전을 하고 있지만 기억에남아 있는 건어쩔 수 없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나를 발전시키는 힌트가 된다고 생각한다. 매번 빨리하고 급하게 해 드리려다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으니 천천히 가는 법을 익혀야 했다. 손님일지라도 늘 친절할 수 없고 긍정을 행할 수 없다. 그러다 번아웃이 오면 멘탈 털리는 것은 내가 되니까. 너무 열심히보다 현명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며 나를 보호해 가며 일하려 한다. 이런저런일로 깨질 때로 깨져버린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중이다. 그 속에서 미움받을 용기, 싫은 소리 할 용기, 거절할 용기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