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우연히 첫 책을 출간했다. 초고에 탈고, 거듭된 퇴고로 머리를 싸맸었는데, 문득 이 주제라면 술술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나와 인연을 맺은 지 19년 차, 법적 관계로 묶인 지 16년 차, 이제는 아이들의 아빠로 주로 불리는 사람인 그에 대한 이야기.
쓰고 싶은 이야기가 점점 쌓여면서 더 이상 주제나 카테고리 구성으로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일단 쓰고 보자. 실은 첫 글을 쓰기까지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였다. 누구나 인생사 펼치면 책 한 권 아닌 사람이 없다니, 나 또한 예외는 아닌 걸로!
첫 이야기는 이른 아침 출근길의 단상에서 시작한다.
백수란 무엇인가?
직장을 안 다니면 백수인가?
그러면 자영업자는?
고정적으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
그러면 프리랜서는?
옳다구나, 그럼 소득이 없는 사람?
근데 10만 원을 벌면 백수가 아닌 건가?
소득의 기준은 무얼까?
이런 뜬금없는 질문이 난무한 이유는 바로 '아직'은 나의 남편인 사람 덕분이다. (실상 '아직'을 강조하며, 그 타이틀을 다시 빼앗아 오고 싶은 분노가 샘솟기도 하지만, 또 내가 도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 오리발을 내밀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혹은 어쩌면 그 또한 그 타이틀을 강렬히 내려놓고 싶을 수도 있다.)
그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부터 재택근무를 했다. 남들은 그렇게도 부러워하는 재택근무이건만,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21년 내가 빡세게 암 치료를 받는 중에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사람을 들들 볶았다.(응? 항암으로 머리털까지 빠진 마누라한테 너무한거 아니니?)
그러더니 끝내 22년 1월 병가 휴직을 냈다.
6개월 뒤 그나마 나오던 기본급이 끊겼고, 급기야 22년 11월, 그 좋은 회사를 제 발로 박차고 나왔다. 마음은 파이어를 꿈꾸며 월급쟁이 삶에 화려한 피날레를 날렸건만, 실상 작금의 상황은...
지금은 항상 바쁘다는데, 무언가 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 없고, 행위의 알 수 없음만큼 소득 또한 없는 상태이다. 아주 작은 고정적인 수입(자기 용돈벌이 정도)이 있고, 정체는 모르겠지만 뭔가 하기는 하니그는 백수인가? 아닌가?
항상 나를 이런 난해한 상황에 빠뜨리는 그. 회사를 뛰쳐나올 무렵, 말도 안 되는 기대를 잠깐 하긴 했다.
'혹시나 살림에 기가 막힌 소질이 있을 수도?'어차피 나도 못하니 한 명이라도 잘하면~'
최근에 여자가 일을 하고 남편이 전업주부이면서 사이좋은 화기애애한 부부의 미담이 종종 들리니, 어차피 살림에 꽝인 나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는 백수라기에는 놀지 않고, 전업주부라기에는 살림을 하지 않는다.혹은 했더라도 너무 젬병이다.
분명 본인은 했다는데 한 것과 안 함의 구분이 모호하다. 노력하는 걸 가상하게 여겨야 한다는 건 인정하지만,우쭈쭈 하다 내 안에 사리 쌓이는 거 어쩔...
그나마 인정해 줄 만한 건 아이들에게는 끔찍하다는 거. 다만 그의 애정 넘치는 육아가 쓸데없는 잔소리로 받아들여진다는 게 문제.
그는 누구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덕분에
나는 돈도 벌고,
온갖 집안일도 하고(청소, 빨래, 음식, 화장실청소 등),
육아도 하고,
재테크도 하고,
집안 대소사도 챙기고,
아픈 친정엄마도 챙기고,
그러면서 중증환자로 내 몸도 케어하는,
그 와중에 또 이렇게 글도 쓰는
만능 멀티 울트라 슈퍼 짱짱 우먼이 되었다.
고맙다, 내 잠재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갈 수 있도로 나를 뽐뿌 하는 게 틀림없다.
어이없게도 이 와중에 당혹스러운 건, 주변에 이런 드래곤볼에나 나올 법한 신비한 능력의 초사이아인급 여성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
오호라, 소위 알파걸이라 불리던 여성들의 상당수가 나처럼 든든한 가장 내지, 튼튼한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우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앗싸!
어쩌다 보니 건강보험증에는 무려 6명이 있다. (내 어깨에 곰 6마리?)시부모님, 친정엄마, 남편, 아이들.(친정엄마는 오빠한테 얹어도 되지만 연말정산 때문에 당겨온 거긴 하다.)
위아래야 그렇다 쳐도, 같이 으쌰으쌰 밀고 끌어도 모자랄 키가 무려 183센티나 되는, 나보다 무려 25센티나 큰 남편이 등짝에 딱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다.
전적으로, 오롯이 날 먹여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남자들처럼 적당한 가장의 책임감을 갖고, 일정한 수입,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대략 최소 300만 원을 바라는 게 그렇게 허황된 욕심이었던 건가.
연애 때는 막연했던 느낌이, 애를 낳고 고초의 시간을 겪으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He lives in his own world."
그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다. 예술가의 그것과는 다르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르시시즘.그렇다고 말을 청산유수로 하면서 아주 뻔뻔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다만 자기 합리화에 최적화된 뇌구조와 화법, 객관적으로 머리는 좋은 편이라,분명 한참 지나고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데, 둘이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에게 말려버린다.
약간의 가스라이팅 같은 느낌으로 20년 가까이 끌려다녔는데, 이제 더 이상 거기에 걸려들지 않아서인지 부쩍 트러블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다.
'어랏,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느낌이려나
원래 글은 격한 감정으로 쓰면 안 되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쓰면서 감정이 정화되기도 한다. 지금도 얼마나 순화되고 정제된 언어로 쓰고 있는가. 갑작스레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싶어서 노트북을 켤 때만 해도, 첫 단어부터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게 아닌가 심히 걱정을 했는데 웬걸.
그러나 다음 편엔 초반부터 불같은 분노를 뿜어낼지도 모른다.이 공간은 나의 해우소니까.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꾹꾹 담아왔던 마음속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한다.
또 내일 새벽에 외로운 전투(혼자 버니깐)를 하러 가야 하므로, 수면시간을 줄일 수 없는 중증 환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