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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르샤 Dec 01. 2023

바보야, 문제는 태도야!

It's the attitude, stupid!

'백수 남편'이라는 키워드로 쓰는 글. 첫 만남과 결혼, 아이를 낳은 뒤의 우여곡절, 한창 커가는 아이가 둘이나 있음에도 무모한 퇴사와 동시에 자발적 백수가 된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었더라면 읽기가 좀 수월했을 텐데. 나의 글쓰기는 그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피크에 달했을 때 시작했다보니, 격한 감정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도 어제 글을 쓴 뒤로, 우린 서로 각자의 삶을 사는 거고, 그 상태가 꼭 영원히 지속될 필요는 없다는 걸 인지한 뒤로 마음이 편해졌다.


아직 글이 많지 않지만 쓸 때마다 혹여나 마음이 쓰인 건, '남편이 고작 돈 못 벌어온다고 이렇게 돌려까기를 하냐'는 반응이다. 생각과 반응은 각자의 몫이지만, 돈 때문에 사람을 괄시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오해는 좀 억울하다. 작년 1월 휴직 후 퇴사, 실질적으로 2년여의 기간 동안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의 이유를 찾고 또 고민했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빠. 내가 기억하는 시기부터 우리 집의 가장은 엄마였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양육권과 빚을 세트로 넘겨주었다. 힘든 시간이었어서인지 학창 시절 기억이 별로 없는데, 대학교 때 수업을 듣다가 채권 추심 전화를 받은 기억이 또렷하다. 머 이런 아버지가 다 있냐며, 명문대 다니는데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시 전화를 하지 않겠다던 나름 친절했던 추심원 아저씨의 목소리까지. 이 기억이 선명한 건, 아마 그 뒤에 한없이 무책임하고 뻔뻔했던 아빠의 대응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사는게 다 그렇지 않은가. 다만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배우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조건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라 생각했다. 나를 먹여살리는 건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제 자식은 건사하는 부모여야 한다고. 그런 나에게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고, 아버지는 공기업에서 정년 퇴직을 하고, 어머니는 살뜰하게 가족을 챙기는 그의 배경은 필수 요구 조건을 만족하는 듯 했다.




예민한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워킹맘인 것도 모자라 장서갈등으로 절반은 눈물로 보냈던 시간. 견디다보니 질풍 노도의 시기는 지나갔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어쩌다보니 둘째가 태어났다. 숙련된 엄마로 조금은 여유가 생겼고, 맞벌이로 급여는 늘어나고, 이제 좀 편해지나 싶던 때 그는 이직을 했다. 둘째가 돌이 되고, 내가 복직을 할 무렵. (내가 복직하면 일을 때려치는 게 이번에 처음이 아니었던 걸 이렇게 깨닫는다.)


사내 커플로 얼마나 갑갑한 회사인지 알고 있고(나도 힘들었다는 뜻이기도하다), 그의 꼬여버린 고과와 대나무처럼 곧은 성정으로는 회사에서의 성공은 요원하다는 걸 알기에 새로운 도전을 응원했다. 그는 아마도 엘리트들끼리, 수트를 쫙 빼입고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는 멋진 컨설턴트를 꿈꾸었으리라. 혹여나 현업 출신으로 기가 죽을까 봐 고급진 정장을 세트로 사들이고, 몽블랑 명함 지갑을 선물했다.


그랬는데.... 활기차고 설레던 모습은 채석달을 넘기지 못했다. 항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에 오롯이 담아내는 그.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번 퇴직과 비슷한 멘트와 패턴이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그게 안 먹히니 어느 새 나는 이렇게 힘들어하는 남편을 외면하는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온갖 희망에 부풀어 폼나는 삶을 꿈꾸던 그의 망상은 반년 만에 끝이 났다. 그리고는 동경해 마지않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4살, 돌쟁이 아기를 나에게 맡기고....


한편으로는 그랬다.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아직 젊은데, 영어는 배워오면 평생 쓸 수 있으니까. 지금은 내가 벌어서 생활하면 되니까. 잠깐은 힘들겠지만 기회를 주고 베풀었으니 돌아와서는 반성하고 잘하겠지 라고. 하지만 막상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리무진 버스에서 잠든 첫째 아이를 토닥이며 얼마나 울었는지.


가장이 되었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남편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일로 향했다. 회사는 고마운 곳이 되었다. 남들이 마다하는 험지 출장은 나에게는 월급외에 출장비가 플러스되는 기회였다. 한창 둘째 아이가 재롱을 피울 시기에 떠난 그, 그리고 나는 출장지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주당 100시간 넘게 일했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돈을 벌어야한다는 절박함, 남편은 관두고 나라도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강박감으로.


이를 악물고 견뎠는데, 돌아온 그의 재취업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미안함 비슷한 감정을 느낄수없었다. 돈이야 어차피 벌고 있으니 버틸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구직 중 소일거리라도 하면서 최소한 용돈 정도는 벌어 쓸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그의 선택지에 그런 건 애초에 없었다. (대학 때도 서울로 유학을 와서는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본 적이 없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의 퇴사를 모르는 엄마와 잔뜩 예민해진 그 사이의 장서갈등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그에게 나는 또 심적으로 힘든 남편을 외면하고 구박하는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실직은 길었고, 연수에서 돌아온지 1년 가까이 지나서야 재취업이 되었다. 실질적인 별거, 이혼까지도 고민했던 힘든 시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의 사과를 기대했지만, 그는 쌍방과실이라고 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그만큼 잘못했으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그의 똑똑한 머리는 자기합리화에 최적화되어 고도의 방어기제를 구축하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퉁치는게 가능한건가.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얻게 된 직장인데, 7년만에 또 멋지게 사표를 날렸다. 그 멋짐의 뒷감당은 또 나의 몫이 되었고. 다만 그 때는 30대였고, 지금은 40대인데. 이제는 받아줄 곳도 없는데. 그 때 그 시간들이 덜 힘들었던 걸까? 아니면 그도 망각의 동물이라 잊은 걸까.




좌우지간 이 장황한 갈등의 과정에서 문제는 돈이 아니라 태도다. 불행히도 그는 그 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 같다. 요즘 그를 보며 '메타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그의 메타인지 작동 장치는 영원히 멈춘 걸까.


각설하고, 주절주절 굳이 어린 시절의 흑역사까지 들추어낸 이유는, 단순히 그가 돈을 못 벌기 때문에 이렇게 열을 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시리즈로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은 바로 '돈을 못 버는' 백수남편이 아니라, '주제 파악을 못하는' 백수남편이다.


바보야, 문제는 태도야! 아직도 모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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