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자발적 백수 남편을 향한 당부
'돈'이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다. 다만 먹고 쓰고 입고 살아가는 것 어느 하나 돈과 무관한 건 없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것,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도리를 하는 것, 나아가 원초적인 본능을 넘어선 좀 더 고상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돈은 대체로 필수적인 요소이다.
결혼 전부터 월급 통장을 스스럼없이 오픈했던 그. 지금도 나와 투닥거리는 상황에서도 공인인증서까지 내어준다. 이렇게 클래스가 다른 속세에 대한 초연함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아,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할 게 있다. 그는 '돈'에 연연하는 걸 속물이라 여겼고, 보다 근본적으로 '돈'이야기만 나오면 머리 아파했다. 즉, 그는 나에게 돈을 준 게 아니라, 힘들고 귀찮은 일을 넘긴 거다.
회사에 속한 것만으로도 답답함에 가슴이 쪼여온다며, 미치도록 그만두고 싶다고 울부짖던 그. 덜 입고 덜 쓰며 그렇게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일견 일리가 있기도 하다. 담배도 안 피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독서 외에 별다른 돈 드는 취미 생활도 없으니. 심지어 친구를 만나는 것도 거의 연중행사 급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 우주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기에 부모형제가 있고, 어쩌다 보니 팔자에 없는 결혼을 해서 처자식이 있고, 회사만 그만두었을 뿐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다.
남자는 결혼하면 효자가 된다더니. 거기에 백수가 되고서는 미안함인지 애틋함인지, 아니면 이제 50을 바라보니 철이 든 건지 부쩍 효심을 드러낸다. 아직도 일흔이 넘은 엄마에게 잘나지도 않은 얼굴을 보여주는 걸 효도라고 착각하는 게 문제지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아져서인지 예전보다 잦아진 시댁 방문.
이유야 어떻든 자기 부모 찾아뵌다는데 문제 될 건 없다. 나에게 동행을 강요하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다. 다만 왕복 500킬로. 기름값과 톨비만 해도 10만 원 가까이 된다. 빈 손으로 갈 수 없으니 용돈 10만 원이라도 드리고 온다. 물론 참기름이며 꿀, 고추장, 된장까지 항상 바리바리 싸주시는 게 훨씬 많다. 하지만 외벌이에 20만 원의 지출은 작지 않다. 생일에 명절, 이렇게 찾아뵙는 것까지 하면 두 달에 한 번 꼴이니 정기적인 지출인 셈이다. 효자까지는 아니어도, 자식 노릇 하는데도 돈이 든다.
물욕이 1도 없는 아들(이것 또한 남편을 닮아서 심히 걱정이 된다)과 달리 행복은 물질, 정확히는 쇼핑에 있다는 걸 이른 나이에 스스로 깨친 딸. 하루는 아트박스, 하루는 다이소, 하루는 페이펄. 한 달 용돈 4천 원으로는 끝도 없는 욕망을 채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딸을 둔 모든 아빠가 그러하듯, 남편도 딸의 물주가 된다. 기껏해야 천 원, 이천 원이지만 쌓이면 돈이다.
지금이야 푼돈이지만, 조금 더 크면 인강용 아이팟 패드가 기본템이 되고, 디스커버리 롱패딩 하나쯤 입어야 할 거고, 등록금에 용돈까지 알바로 벌어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일 년 천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은 지원해주고 싶다. 낳는 것뿐 아니라 기르고 돌보는 것까지 해야 부모인지라, 부모 노릇에도 돈이 든다.
'처자식'이란 말이 세트이니 남편 노릇도 한 번 언급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백수 아니었을 때도 딱히 나한테 돌아오는 건 없었으므로 패스!
뜬금없이 대한민국 국민은 왜 나오냐고? 회사를 그만두고 칼 같이 집으로 날아온 고지서. 바로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건강보험은 우여곡절 끝에 피부양자로 밀어 넣었지만, 국민연금은 방법이 없다. 나이를 고려하면 못 받지야 않겠지만, 수익률 관점에서 크게 득 될 게 없기에 최소한으로 낮췄더니 한 달 9만 9천 원. 거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종신 보험 15만 원. 병력이 있으니 나중에라도 아이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돼 2년 전에 가입한 건강보험 10만 원. 첫 직장 퇴사 후 유지하고 있는 개인연금 15만 원.
아무것도 안 하고, 극단적으로 안 먹고, 안 입고, 안 나가고, 안 써도, 숨만 쉬어도 '그'에게 따라붙어 나가는 돈이 매달 50만 원이다. 돈의 크고 적음을 따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안 쓰면 지출이 0이라 생각하는 그의 신선한 발상이 답답할 뿐이다. 더군다나 본인이 항상 얼마나 아끼고, 절약하는지 강조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나가서 쿠팡 이츠 배달을 하라고!'라는 나의 마음을 알아버렸는지, 그는 신종 알바에 꽂혔다.
우연히 알게 된 신기한 알바. 길바닥에 나뒹구는 킥보드를 정리하면 작게는 100원에서 3000원까지 랜덤 포인트를 준다. 이 포인트는 편의점 상품권으로 교환할 수 있다. 토스 10원 받기에도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이 시기에 꽤 괜찮은 알바임에 틀림없다. 오며 가며 보이는 걸 한 번씩 정리만 해도. 내가 먼저 발견해서 남편에게 알려주었다. 일명 줍줍.
쉽게 돈 버는 건 맞지만, 이 더운 여름날 무거운 킥보드를 한참 끌고 가서 꼽는 건 돈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시간당으로 따지면 최저임금이 되려나? 이동 중에 경로가 맞으면 하라는 취지의 알바였는데, 백수가 된 그에게는 최적이었나 보다. 어쩌면 육체노동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그가 몸은 써서 스스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낀 걸까?
예전 같으면 그게 얼마나 되냐며 궁상떨지 말라며 무시했을 텐데. 매일 저녁 아이들이 룰렛 돌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핑계 삼아 그는 줍줍의 달인이 되었다. 많은 날은 하루에 무려 40회. 말로는 커피숍에서 일하다가 운동 겸 나와서 한다는데, 이 정도면 거의 알바 혹은 집착 수준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져서 예전만큼 기회가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그를 보며 기뻐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줍줍으로 모은 포인트로 교환한 편의점 쿠폰. GS25에서는 통신사 멤버십 할인이 되는데, 등급이 달라서 나는 1000원당 100원, 그는 50원. 아이들과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는데 100원이 아닌 50원 밖에 할인을 못 받았다며 안타까워하는 그. 아... 가슴 한쪽이 서늘하다.
그는 요즘 갱년기가 오는지 더위를 심하게 탄다. 워낙 마른 체질이라 추위는 심하게 타지만, 더위는 잘 참는 편이었는데. 혈기왕성한 아이들도 그다지 덥지 않다는데 혼자 얼굴이 벌게져있다. 그냥 덥다고 에어컨을 켜면 될걸. 아이들에게 연신 묻는다.
"얘들아 덥지 않아? 에어컨 켜줄까?"
하지만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그를 닮은 아들은 무심하게 대답한다.
"아니, 괜찮은데"
가뜩이나 안 생긴 얼굴이 붉어져서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나를 쏘아보며 팔로 연신 부채질을 한다. 진짜 부채로 하면 더 나을 텐데 왜 저러는 걸까? 마음 한 켠에서는 쿨하게 '더운데 에어컨 켜~'라고 윤허하고 싶다가도, 힘들어 헉헉 거리는 모습이 쌤통이라 모른 척하게 된다. 쏘아보지 말고 애원의 눈빛을 보내란 말이야!
작년 초만 해도 그는 나름 유명한 외국계 기업의 억대 연봉자였다. 물론 그때도 낭비나 과소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백수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지지리 궁상의 레벨이 업그레이드되는 듯한 건 나만의 느낌일까. 점점 작아지는 듯한 그의 자존감에 마음 쓰이면서도 열불이 난다. 너가 자초한 거잖아!
숨만 쉬어도 돈이 들고, 결국 그의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선결 조건이 돈이라는 걸 이제는 깨달았으려나? 부디 이제 줍줍 알바 말고 본업을 찾읍시다! 재취업이 아니더라도 자식 노릇하고, 아빠 노릇하고, 여유되면 남편 노릇도 하고, 자존감도 지키고, 나아가 품위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도록. 플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