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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정 Oct 25. 2024

내 안의 씨앗


요즘에는 씨 없는 포도도 많이 나오지만, 캠벨 포도 같은 걸 먹을 때 나는 껍질을 제외한 과육만 꿀떡꿀떡 넘기는 편이었다. 

껍질 벗긴 포도알을 입안에 넣으면 과육의 달콤한 과즙이 팡팡 흐른다. 그걸 씹으면 이내 신맛도 같이 느껴졌는데 나는 달콤한 과즙만 맛보고 싶었다. 씨를 일일이 뱉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꿀떡 삼키곤 했다. 


수박도 어렸을 때는 귀찮거나 혹은 실수로 씨를 삼킨 적이 많았다. (지금은 물론 수박씨는 뱉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뱃속에서 수박이 자란다고 말했다. 씨를 삼키는 습관을 고쳐주려고 나를 놀린 것이었지만 어린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내 뱃속에서 수박이 자라면 어쩌지? 

그럼 그 수박은 어떻게 나오는 거지? 

엄마가 아이를 낳듯이 수박이 나오는 건가? 

너무 아플 것 같은데... 

수박은 너무 큰데... 


그러다가 며칠 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안심하며 그냥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이후로 포도씨를 아무 걱정 없이 꿀떡꿀떡 삼켰을 테지. 






어린 시절의 언젠가에는 집에서 수박을 먹으면서 내가 뱉은 수박씨를 모은 적이 있다. 당시 살던 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집 한켠에 텃밭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때 문득 거기에 수박씨를 심으면 수박이 자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텃밭에서 가족들이 무언가 심어서 가꾸거나 했던 추억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이 기억만 또렷하다. 

어릴 때니까 심는다는 개념도 특별히 없어서 그냥 텃밭에 수박씨를 뿌려두기만 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물을 주거나 어떻게 가꿔야 한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랬으면서 시간이 지나도 왜 수박이 안 자라고 아무 변화도 없는지 이해를 못 한 채로 혼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무언가 씨를 심고 키워본 적은 없지만, 최근에는 내 안에 그런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남과의 비교가 가장 쓸모없고 과거의 나와의 비교만이 의미 있는 거라고 하던데, 요즘의 나는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나은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단번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꾸준히 못하는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게으름과 자괴감에 좌절한다. 원하는 것에 비해 나오는 아웃풋은 변변찮고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에 한 번 더 괴로워한다. 

애초에 나는 씨앗을 안 심은 게 아닐까? 아니면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심은 것도 아닌 뿌려두기만 한 채 무언가 저절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내 안에 씨앗을 심고 조금씩 들여다봐야겠다. 이 씨앗이 나중에 여러 송이의 포도가 될지 아니면 하나의 커다란 수박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더하기 

김영하 작가는 먹고 남은 아보카도 씨앗을 집 정원에 버리고 잊어버렸는데 어느 날 그 자리에서 몇 미터나 쑥쑥 자라난 아보카도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정원의 흙이 비옥해서 그런 것 같다고. 

옛날 우리 집의 텃밭 흙은 상태가 별로였나 보다. 나라는 사람의 흙은 지금 어떤 상태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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