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9호선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다. 마침 도착한 급행열차에서 많은 사람이 내리고 그만큼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 같은 풍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하철역 안 플랫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나는 일반 완행열차를 타야 했다. 다음 차를 기다리는 내 머릿속에는 몇 가지 풍경이 떠올랐다.
장면 1
지하철 안에서 출입문 사이를 왔다 갔다 뱅뱅 돌며 통화하던 청년.
장면 2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남학생 둘이 지하철 열차에 아슬아슬하게 탔다. 자기들끼리 뭔가 한참 얘기하더니 이거 타고 합정에서 내리면 된단다. 이거 경의선인데...
장면 3
열차가 용산역을 떠나자 어떤 아주머니가 두리번거리더니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묻는다. 이거 종각 가요?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거 인천행인데요...
장면 4
펫샵의 좁은 우리 안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강아지. 작고 예쁘지만 쇼윈도에 코를 박고 자세히 보면 왠지 떨고 있는 게 보일 것만 같아 한없이 연약해 보이던 존재.
내가 지하철을 처음 타본 건 성인이 되어서였으니 꽤 늦은 편이다. 지금이야 적어도 1~7호선 정도는 셀 수 없이 타봤고, 어떤 곳은 지하철을 타기보다는 버스를 타거나 걸어가는 게 더 빠르다는 걸 알 정도가 되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도 가끔은 반대 방향을 잘못 탔다가 당황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이와 같은 걸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앞에 언급한 장면들이 누군가가 볼 때는 이해되지 않거나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언젠가는 나도 저 장면 어딘가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급행을 타고 빨리 도착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일반열차가 필요할 수도 있다. 급행열차는 빨리 가는 만큼 타려는 사람이 많아 자리가 부족하기 십상이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반열차를 타야 하기도 한다.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주위 사람 따라 급행 탔다가 정작 내가 가야 하는 역을 지나치는 것이다.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있어서 길을 돌아왔거나 오래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도착할 수만 있다면 꼭 늦은 것만은 아니다. 그때 내가 안 된 게 이러려고 그랬구나. 그때 내가 그런 걸 겪었기 때문에 지금 달라질 수 있었구나. 그러니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고 괴롭히지 말자. 가끔은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