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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정 Oct 25. 2024

단 한 번의 백일장


작가들의 이야기를 보면 학창 시절 백일장에서 상 받은 기억 하나쯤은 다들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교내를 벗어난 대회에서 상을 타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그런 백일장도 딱 한 번 나갔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의 어느 날, 종례를 마칠 무렵 담임선생님이 백일장에 나갈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든 손을 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였다. 그래서 그날도 마음은 있지만 소심함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두 친구가 손을 들었다. 


A와는 2학년 첫날 우연히 짝꿍으로 앉게 되면서 서로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특이한 구석이 있어서 반에서 친한 친구가 별로 없는 아이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공통점을 가진 또래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친구였다.

B와는 A만큼 친하지도 않았고 나와 성격이 많이 달랐다. B는 꾸미는 걸 좋아했고 아이돌의 열성적인 덕질로도 반에서 유명했다. B가 글을 쓰겠다며 백일장에 나간다고 하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 두 명이 나간다고 하니까 없던 용기가 생겼는지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반에서 백일장에 나가는 사람은 세 명이 되었다.





4월 말에 열린 백일장에서 우리는 아무 데나 앉아 그날 주어진 글감을 받았다. 글감은 '아버지'와 '풀'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 주어진 시간 내에 산문이나 시를 쓰는 것이었다.


글감을 고르는 것부터가 난항이었다. 두 친구는 아버지를 골랐다. 그들이 글을 시작하는 동안에도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풀을 골랐다. 그러고도 뭘 어떻게 쓸지 고심하며 멍하니 있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 내에 산문으로는 다 쓰지 못할 것 같아서 시를 쓰기로 했다. 지금은 시가 더 어렵다는 생각에 쓰지 못한 지 오래지만, 그때는 뭘 몰랐기 때문에 단순히 짧다는 이유로 시를 선택할 수 있었다. 마침 백일장 장소가 잔디밭이었다. 주위를 보면서 한 줄 한 줄 글을 써나갔다. 내가 그 짧은 글을 완성하는 동안 두 친구는 내 글보다 훨씬 긴 글을 다 써냈다.


마감시간을 얼마 앞두고 비슷하게 완성한 우리는 제출하기 전에 서로의 글을 바꿔보기로 했다.

사실 오래전이라 지금은 A의 글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 A의 글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보다 잘 쓴다는 생각 때문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그에 비해 B의 글은 평범했다. 아버지라고 하면 누구나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이미지에 대해 썼던 글로 기억한다. 그래서 글을 읽고 돌려주면서도 영혼 없이 "잘 썼네."라며 하나마나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문제는 발표가 난 후였다. 우리 반에도 수상자가 나왔는데 나나 A가 아닌 B였다.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B의 글을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그 글을 보았다. 분명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운 평범한 글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입상 같은 작은 상이었지만 입시에는 반영할 만한 수상내역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B가 다른 백일장에 나가거나 또 다른 글을 쓰는 걸 본 적은 없다. A는 결과에 별 상관없는 듯 다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글을 썼다.


나는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고 마음속으로 혼자 격정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B가 나와 더 친한 친구였다면 혹은 내가 납득할 만큼 특별히 잘 쓴 글이었다면 나는 다르게 생각했을까? 인정하기 싫고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마음을 말하자니 스스로도 좀생이처럼 느껴져서 아무에게도 내보일 수 없어 더 갑갑하기만 했다. 어렵게 용기 내서 나간 건데 아무 소득도 없었던 데다 B가 상 받은 것을 부러워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렵게 용기를 냈건 말건 심사위원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일이다. 내게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글이었지만 그들의 기준에는 적합했으니까 뽑았을 것 아닌가. 그런 백일장은 특이한 개성이나 특별함보다는 평범하더라도 별다른 단점 없이 어느 정도 준수한 글을 더 선호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그때의 내가 못나기는 했어도 그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축하는커녕 시샘하는 내가 창피해서 그 당시에는 비록 말 못 했어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솔직한 거라고. 다만,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인생은 길기 때문에 단 한 번으로 결정되는 건 많지 않다고. 결국 꾸준히 오래 쓰는 사람이 승자라고.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다짐하듯 해주고 싶은 말이다.



-풀잎-


키 작은 나는 저 위에 있는

뿌연 하늘이 부럽지 않다.

당신의 손가락만큼도 안 되는 나는

내려다보는 당신들이 부럽지가 않다.


나는 가장 약하고도 강한 존재이어니

그 수많은 겨울에도 울지 않았다.

그 수많은 세상의 상실을 지켜보면서, 그 속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푸르름밖에 모르는 나는

붉은 나를 본 적이 없다.

풋풋함밖에 모르는 나는

역겨움을 풍겨본 적이 없다.


언제나 갓 태어난 듯 살아가는 나는

오늘 당신의 손길 또한 두렵지가 않다.


당신이 지금 밟고 돌아보지 않아도

내일이면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죽고 또 살아나도

언제나 그 모습의 나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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