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팟캐스트로 관심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한번은 에세이를 낸 장강명 작가의 인터뷰를 듣다가 인상적인 말이 귀에 꽂힌 적이 있었다. 데뷔 초반에는 그 역시 독자들의 리뷰나 평론가의 서평 등을 열심히 찾아보고 자신의 의도와 비교해 보기도 했단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몇 건 정도 올라왔는지만 간간이 볼 뿐 리뷰나 평 자체를 자세히 보는 일은 별로 없다고 했다. 장강명 작가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 (등단한지 좀 됐거나 책을 많이 낸)이 비슷한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또한 다른 작가의 책을 볼 때도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고 거기서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20~30대에는 한창 무언가를 보러 다니기 바빴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나 뮤지컬, 연극, 전시 등 보고 싶은 것도 봐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시류를 놓치지 않으려고 의무적으로 본 것도 있었고 괜히 봤다 싶을 만큼 실망스러운 작품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인생작을 만나기도 하고 나름의 취향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발발한 즈음부터 열심히 보러 다니던 발길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뜸해졌다. 모두가 오프라인 활동을 자제하던 때였고 경제적인 사정까지 겹치면서 문화활동에 돈을 쓰는 것이 사치처럼 여겨졌다. 연극 같은 건 때를 놓치면 보기 어려움에도 전처럼 일부러 가는 것이 쉽지 않았고, 영화관 VIP였던 내가 재작년부터 극장에 가서 본 영화가 5편이 채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낯설기도 했다. 새롭게 나오는 작품보다는 평이 좋았지만 이미 지나가서 내가 놓쳤던 작품을 뒤늦게 보기도 했다. 그마저도 깊게 빠지거나 기를 쓰고 찾아보려는 마음이 예전보다는 시들해진 편이었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자 어느샌가 다른 사람의 작품보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이야기에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장강명 작가가 말한 바도 어쩌면 내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고 나면 그것은 모두의 것이 된다. 백 명이 보면 백가지의 감상이 생길 것이고 만 명이 보면 만 가지의 감상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감상을 만들고 느끼는 동안 작가는 새로운 작품에 돌입한다. 종종 작가들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 최근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문득 초등학생 시절 썼던 어느 날의 일기가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 일기를 쓰고 싶어서 쓴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검사받기 위해 쓴다는 점에서 방학 동안 밀린 탐구생활을 해야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기를 쓰기도 싫었고 쓸 것도 없었다. 그래도 숙제는 해야겠어서 고민 끝에 재밌게 본 명작 소설의 평론을 옮겨 적었다. 소설책의 도입부에 실려 있는 그것은 소설보다 더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옮겨 적다 보니 3~4페이지가 넘어갔는데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나 내 일기장에서 가장 튀었다. 누가 봐도 초등생이 쓸만한 수준의 글이 아니었음에도 담임 선생님은 그 일기의 말미에 “수정이가 쓴 거니?”라는 멘트를 써주셨다.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 한 줄을 보고 마치 혼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학생 때 일기는 선생님에게 검사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써야 해서 쓰기 싫었고, 독후감은 뭘 써야 할지 몰라서 어려웠다. 나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독후감을 쓸 때 감상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줄거리만 잔뜩 쓰곤 했는데 때로는 그걸 요약해 쓰는 것조차 힘들 때도 있었다. 일기도 독후감도 나의 생각이 중요한 건데 그때는 그걸 미처 몰랐고 너무 어렵기만 했다.
내 생각으로 채워진 글을 쓴 것은 놀랍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소설을 쓴 지는 꽤 되었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외피를 한 겹 두른 것이라면, 에세이는 그보다 더 날 것에 가깝다. 그야말로 내가 겪은 일에 대한 내 생각으로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억이 일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글이 되기 위해 어떠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며 쓴다. 그 과정에서 원래 쓰려던 이야기를 버리게 되기도 하고, 생각으로만 그쳤던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완성도만큼이나 글에 대한 반응 또한 매번 다르지만, 주기적으로 계속 쓸 수 있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계속 한다는 게 중요하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다 보면 나만의 방법이나 색깔을 찾게 되고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나를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쓰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써줄 사람은 나뿐이다. 나의 기억이 이야기가 되어 종이비행기처럼 세상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내 생각 또한 방구석에서 광활한 하늘로 날갯짓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