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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정 Oct 25. 2024

글을 쓴다는 건 아랫도리를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짧았던 대학 시절, 기대했던 대학생활과 많은 것이 달라 실망하던 와중에 내가 기다리는 시간은 딱 하나였다. 세팅 파마의 긴 머리와 메리제인 스타일의 통굽 구두가 인상적이었던 젊은 여교수님이 담당하는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동기 남학생에게 시 한 편을 낭독하라고 했다. 시인의 이름이나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시의 마지막에 나온 '아랫도리'만이 뇌리에 남았다. 열아홉 나이에 남자의 음성으로 듣게 된 아랫도리라는 단어는 꽤  낯설었다. 괜히 내가 옷을 벗은 것 마냥 아랫도리가 싸해지고 반대로 내 얼굴은 뜨거워졌다. 그런 말이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따금씩 내게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비밀에 가까웠다. 

초등학교 때 어떤 친구는 우리 집에서 놀다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학교폭력에 대해 고백했고, 학창 시절 어떤 친구는 자신의 가족사와 자살 충동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백은 이어졌다. 어떤 이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병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하면서도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들의 고백이 한참 지난 후 나는 궁금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을까. 내가 무언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혹여라도 누군가에게 말할까 봐 걱정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이내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 순간 그 곁에 내가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걸 내게 말해주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하나의 경험으로 인해 나도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에세이 쓰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2~3주 간격으로 만나 서로의 글을 리뷰하는 방식이었다. 그중에 '나를 사로잡고 있는 감정'이라는 주제에 대해 쓰는 주가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사적이고 무거운 이야기라 보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까 봐 다른 이야기들도 떠올려보았다. 며칠 동안 다른 일들로 바빠 미뤄두고 있던 와중에도 그것에 대해 잠깐씩 생각하곤 했다. 나의 깊숙한 곳에서는 그 이야기를 쓰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묻어온 이야기를 쓸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가족들과 나의 전 생애에 얽힌 이야기이기에 쓸지 말지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끝내 내 마음의 소리에 따르기로 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굴렸던 이야기를 하루 종일 앉아 글로 썼다. 쓰는 동안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더듬어야 했기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다 쓰고 난 후에는 후련함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글로 처음 보게 되는 사람이 나를 너무 잘 아는 가까운 사람이어도 곤란했고, 반대로 불특정 다수여도 곤란했다. 이 에세이 모임의 멤버들은 나를 아주 잘 알지도 않지만 아주 모르지도 않았기에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오픈하게 될 이야기라면 같이 글을 쓰고 내 이야기를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면 좋겠다 싶었다. 



모임 날, 진행자를 포함한 일곱 명의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우리는 각자의 글에 대해 느낀 점과 개인의 소회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전까지는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중을 두고 말했지만, 이번 주제의 글은 개인사에 대한 내용이 주가 되었던 만큼 비판보다는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 흘렀을 무렵 내 이야기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울면서 어떻게 읽었는지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글의 후기에 내 이야기에 혹시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손 한번 잡아주는 걸로 충분할 것 같다고 썼다. 내 옆에 앉아있던 분이 그 말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그걸 보고 손잡아 주는 것보다는 안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전까지 사람들이 우는 걸 보면서도 전혀 울지 않았다. 담담한 마음이기도 했고, 글쓴이가 독자보다 먼저 울어선 안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안아주는 순간 가슴속에 회오리가 치면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내게 단단하고 깊은 사람인 것 같다고, 그렇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의 사연보다는 내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에 울어주었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모임이 끝나고 몇몇 사람들이 나를 또 안아주었다. 






그 글을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의 가장 최하층 지하실의 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이전보다 조금은 나를 덜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써본 이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 남아있지만, 글쓰기의 자기 치유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경험한 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아랫도리를 보이는 일과도 비슷할 것이다. 아랫도리를 보이는 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씻거나 가장 사적인 잠자리를 가질 때 가능하다. 처음에는 주저하게 되고 부끄럽지만, 결국 남는 것은 후련함과 애정이다. 

내가 그날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도 같은 과정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잦은 망설임의 시도가 있었다. 막상 오픈하고 나자 내게 남은 건 카타르시스와 그 이야기를 함께 공감해 준 사람들의 애정이었다. 



강렬했던 아랫도리 시를 들었던 날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문학의 이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일들이 생기곤 한다. 그럴 때 곁에 그 이야기를 가감 없이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비판하거나 서툰 조언 따위 하지 않고 온전히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글을 써보기 바란다. 누구에게 내보이지 않아도 좋다. 그저 펜이나 키보드로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더 나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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