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긋는다는 것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선

by 한수정


상담을 가기 전 감정일기 숙제에 많은 공을 들였다.

때마침 그즈음 속상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민감한 이야기여서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며칠간 그 일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의 파도를 탔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 억울하고 속상하기만 했던 감정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게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결과로 전환되었다.


나에게도 주목할만한 사건이었기에 이 일을 감정일기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담사는 한 줄 정도만 써도 된다고 했지만, 쓰다 보니 A4 3장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에세이를 써본 경험 덕분인지 글로 정리하면서 내 마음도 한번 더 돌아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인쇄해온 글을 다 읽은 상담사가 말했다.


"글을 쓰던 분이라 그런지 정리를 정말 잘해오셨네요. 이렇게 써오는 사람 의외로 잘 없거든요.

감정일기 써보니 어떠셨어요?"


"일단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요. 큰 맥락으로 보면 부정적이었던 마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어요?"


"마음이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전화위복 같은 기회로 삼는 게 저한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제 실력에 대한 부분을 약간 긍정하게 된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다음에 또 그런 상황이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실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은 아직 못했는데."


"한번 생각해봐요. 내가 어떤 부분에서 놓쳤던 것 같은지."


"어디까지를 내 걸로 인정할지 그런 경계 같은 걸 확실히 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게 물론 일에서 공적인 문제도 있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영역도 있잖아요. 쓰다 보면 이건 내가 썼지만 좀 잘 한 것 같고, 그래서 남 주기는 아깝다. 그럴 때가 있거든요. 내 능력의 100%는 내거를 할 때 쓰고, 다른 일에는 절반 내지는 80% 정도까지만 마음을 쏟자. 뭐 그런 거요. 물론 하다 보면 그게 또 잘 안되기는 하지만."


"내 마음의 자세는 이랬다는 거죠.

그런데 그거 되게 좋은 거예요. 지금 중요한 얘기해주셨어요.

본인이 얘기했잖아요. 이건 돈도 걸려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있지만, 내 마음의 자세에 대한 태도를 내가 명확히 안 했기 때문에 불이익이나 억울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하는 거니까. 내가 만약에 이렇게 경계를 잘 그었어요. 그러면 좀 어떨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이야기를 꺼내자 짝꿍과 친구는 내가 느끼는게 이상한게 아니고 당연히 기분 나쁘고 억울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의 말이 적잖은 힘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맞다고 하는데, 나 스스로가 나를 잘 못 믿어. 그거 느껴지죠?"


'네. 내 마음을 곁의 사람들 말을 듣고 확신했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말했다.


"수정 님이 항상 내가 잘하고 있는데도 나를 못 믿어주다 보니까 거기서 오는 불안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에도 확신이 없는 거거든요."


"네. 자꾸 반복되는 걸 저도 생각은 하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찾아야 돼요. 그걸 알면 나 중심으로 흘러가라는 게 아니라, 어떤 건 되고 안 되고 기준을 정할 수 있게 되거든요. 이건 내 거지만 양보할 수 있어. 그러면 억울하거나 속상할 일도 없겠죠. 그런데 내 마음은 사실 안 그런데, 다른 사람 말이나 상황에 휩쓸려서 손 놓고 있으면 경계가 지워지는 거예요. 정신 차려 보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싶어지는 거죠. 그래서 바운더리를 세우는 거거든요.

그러려면 수정 님이 내가 뭘 원하는지부터 찾아야 돼요. 내가 뭔가 요구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거고, 아니면 내가 맞닥뜨려야 되는 상황도 있을 거고, 아니면 저 사람 말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될 상황도 있을 거잖아요.

그럴 때 내 마음에 경계를 정해두고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는 거죠. 여기까지는 네가 와도 나는 괜찮아. 그렇지만 네가 이걸 넘으면 나는 못 참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요.

그걸 누가 정해요? 내가 정하는 거예요."






듣고 보니 그런 경계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뭘 원하는지, 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남을 배려하는 것과 나를 챙기는 것 사이에서 나는 기준을 잘못 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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