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도 보고, 일도 하지만 방향은 아직 안 보일 때
분석 업무를 맡은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습니다.
쿼리는 익숙해졌고, 데이터 구조도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대시보드를 설계하고 지표를 정리해내는 일 역시 무리 없습니다. 기술적으로 막히는 부분은 점점 줄어들었고, 실무에서 요구하는 대부분의 분석 과업은 조절하며 처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묘하게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데이터를 제가 직접 다뤘음에도, 방향이나 전략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면 끝까지 주장하기가 어렵습니다. 결론은 누군가의 말로 정리되고, 해석은 도메인에 밝은 다른 사람의 몫이 됩니다.
돌이켜보면, 일정 기간이 지난 분석가라면 대부분 기술적인 기반은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 도메인까지 관심을 갖고 깊이 들어가는 케이스가 현실적으로 그리 쉽지 않습니다.
쿼리를 짜고, 분석 프레임을 설계하고, 수치를 검토하고 정리하는 작업 자체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결국 그 반복적인 실무 속에서 ‘이 데이터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가’, ‘무엇이 의미 있는 변화인가’를 깊게 생각할 여유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조직 안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그 맥락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최근처럼 AI가 빠르게 분석 자동화를 대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단시간에 단순히 쿼리를 짜고 데이터를 뽑거나 대시보드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은 공수에 비해 점점 낮은 가치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듭니다.
반면, 데이터를 해석하고 전략에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AI가 수치를 정리해주는 수준은 사람의 몫을 대체하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조직은 변화에 맞춰 움직이게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지점을 짚어낼 수 있는 사람에게 중심이 옮겨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역할은 도메인을 오래 다뤄온 BA들이 맡게 됩니다. 이 흐름은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도드라집니다. 큰 조직일수록 기술적인 분석보다 해석력과 전달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온 일들이 아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 위에 전략적인 선택을 붙이면, 분석가로서 훨씬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정밀하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특정 도메인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단순한 수치 해석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맥락과 의미를 먼저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그 사람이 보면 정확하게 나올 것”이라는 신뢰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조직 안에서의 입지가 자연스럽게 바뀌는 순간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조직 바깥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데이터 분석가라는 직업은 회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는 스킬셋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부업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을 정리해 공유하고,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커뮤니티와 독립적인 활동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의 나’에만 머무르지 않으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무대는 훨씬 넓습니다.
결국 분석가 뿐만 아니라 직장인이 조직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일은, 그 안에서 나만의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무작정 따라가는 것도, 무작정 벗어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구조 속에서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를 계속해서 묻는 자세입니다.
요즘 유튜브나 콘텐츠 플랫폼을 보면 퇴사를 종용하거나, 혹은 반대로 ‘조금만 더 버티라’는 단정적인 목소리들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이 말들이 대부분 개인의 고민 없이, 마치 정답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이 시기에 이걸 못 하면 바보다’,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는 식의 자극적인 조언은 결국 개인의 사유를 방해하고,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지금 이미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결단이 아니라 여백일 수 있는데, 콘텐츠는 그 여백마저 비워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멈추면 실패인 것 같은 기분만 남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질문은 인생에서 매우 큰 질문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나는 이 조직 안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이 부분이 개인의 인생이라는 측면에서는 전략을 짜는 일입니다.
이 질문에 고민을 시작하고 솔직해지는 순간, 다니기 힘들었던 회사도, 불투명하게만 보였던 미래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묘하지만, 해방감 같은 것입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다’는 감각이 만들어내는 여유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분석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회사 안에서 일하는 누구든, 언젠가는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이 일 안에서 어떤 사람인가’, ‘앞으로는 어떤 역할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일도, 조직도, 나 자신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략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를 인식하고, 다음을 준비하려는 의지가 전략의 시작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분들이 이 시간을 지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방향을 아는 사람은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고, 조금 더 멀리 걸어갈 수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전략으로, 잘 버티고, 잘 나아가고 계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