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ots Oct 07. 2023

붕대로 팔과 붓을 이어 주기

물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작업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아크릴이나 유화가 아닌 과슈 물감을 쓰고 싶었다. 나는 입에 붓을 물고 싶지는 않았다. 붓이 금방 망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붕대로 붓과 팔을 이어 주기로 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잉크 펜 드로잉의 정교함에 물려있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정교함 반대편에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몸의 떨림을 자연스럽게 그림이 넣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는 보치아를 할 때 홈통을 쓰지 않고 발로 공을 투구하고 있었다. 신체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신체를 풀어주는 방식의 그림이 나에게 어떤 것을 주게 될지 궁금했다. 이런 배경에서 나의 물감 그림이 시작되었다.


<섬세하지 않은 그림 1>, 종이에 과슈, 36cm * 51cm, 2019


그해 여름에 그렸던 물감 그림은 가을에 있었던 전시 때 전시했다. 그리고 워크숍에서 잉크 펜 드로잉에서 물감 그림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발표했다. 나는 그때부터 신체를 풀어주는 방식이 내게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해봄으로 신체의 경험을 축적하고 신체를 재해석하는 일이 일종의 놀이가 된 것이다. 


나는 그때를 시작으로 계속 물감 그림 그리기를 이어오고 있다. 정말 작은 종이에서 장지 120호까지 여러 그림들을 그리면서 움직임에 대한 고민을 이어왔다. 지금은 그림을 그릴 때 움직임을 크게 하려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나의 신체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그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그림을 마주하면 성취 이상의 무엇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그림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내 움직임만이 나의 그림의 진행과정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따라갈 뿐이다. 그림 그리기는 이렇게 계속 누적된다.


2019년 온새미로 전시


말하기를 제어되지 않는 신체의 움직임에 맡긴다면 그 언어는 얼마나 어눌할까. 그리고 그 어눌한 언어는 어떻게 소통이 될까. 소통이 가능할까. 그 언어의 어눌함은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내가 물감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릴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언어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의 그림은 내가 스스로 신체에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모든 것이 재해석되고 의미가 갱신된다. 


장애가 있는 몸을 기존의 틀과 다르게 본다면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다. 내가 장애를 다르게 읽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담론을 계속 물고 늘어지면 그 언어는 갱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나의 신체는 계속되는 갱신을 통해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섬세하지 않은 그림 11>, 종이에 과슈, 36cm * 51cm, 2019


<섬세하지 않은 그림 12>, 종이에 과슈, 36cm * 51cm, 2019
이전 07화 테이블에 삼각대 올려놓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