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자주 싸우는 편이다. 며칠 전에도 싸웠다. 싸우는 양상은 늘 다르다. 실랑이를 하다가 내가 먼저 사과할 때도 있고 와이프가 먼저 꼬리를 내릴 때도 있다. 또 어느 날은 냉랭한 기운이 하루 동안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아이를 낳기 전에 크게 싸운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부부싸움에도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자주 싸우는 건 당연히 능사는 아니나 평소에 돈독한 관계가 계속 이어지기만 한다면야 갈등이 생길 때마다 충돌하고 풀어내는 걸 반복해 상호 앙금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자주 싸우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싸우는 게 좋을 것은 당연히 없고 그래서 가급적 갈등을 만들지 않고 원만하게 풀어내는 것도 좋다. 그래서 남에게 보이는 부부싸움의 모양새로 그 부부의 좋고 나쁨, 또 그 싸움의 바람직하고 말고의 여부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부부 사이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인 만큼 그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 중 하나인 부부싸움도 그들만의 문제인 것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싸움 후에 그 부부가 입을 맞추고 손을 잡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면 그것은 확실히 좋은 부부싸움이다. 뭐,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키스를 거의 하지 않는 부부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낮에 좀 싸웠더라도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별안간 박장대소도 하곤 하는 친근한 관계를 밤에 이어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부부싸움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싸우고 나서 한 두 달쯤 지났을 때 '분명 한두 달 전에 뭔가 싸운 것 같은데 왜 싸웠더라.' 싶은 망각마저 함께한다면 금상첨화다. 사람이야 늘 불완전하기 때문에 지난번 싸웠던 주제로 또 싸울 수도 있지만 점점 그 빈도와 강도마저 줄어든다면 그제서는 완벽한 부부관계요, 완벽한 부부싸움이라 할 수 있다. 이혼을 생각하고 담판을 짓는 것이 아니라면 부부가 싸우는 목적은 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니 만큼 한 번 싸운 주제로 다시 안 싸운다면 그것은 싸움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좋은 부부싸움의 조건' 혹은 '부부싸움의 기술'을 생각한 것은 얼마 전 휴일에 와이프와 낮에 좀 싸우고 나서 주말에는 낮잠을 자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데 차에서는 곧잘 곯아 떨어지는 아들을 낮잠 재우고자 드라이브를 할 때였다. 분명 사뭇 냉랭했던 우리가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분명 두 시간 전에 냉랭했는데 지금 하하 호호 웃고 있네? 좋다. 이 상황.' 하며 아이가 차에서 자는 동안 동네 주변을 천천히 차로 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결론은 명쾌한 한마디로 내려지지는 않았다. 그저 부부싸움 혹은 부부갈등이 왜 일어나는지 심도있는 토론한 내용 전체가 우리 부부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우리 부부가 서로 가장 크게 공감한 것은 많은 매체에서 부부싸움의 해결 방안이라고 나온 수많은 조언들의 한계였다. 많은 곳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태도 혹은 상대방의 의견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자세와 반응이 부부싸움을 방지하거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기술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묻고자 한다. 내 마음은 내 것인가? 누굴 싫어하고 싶으면 싫어할 수 있고, 누굴 사랑하고 싶으면 바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냐고 묻는 것이다.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내 마음을 숨기는 것은 직장에서나 쉬운 일이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참 어려운 것은 직장 상사나 동료처럼 대하며 내 마음을 내내 숨겼다간 너무나 외로워진다는 것이다. 직장 같은 사회생활은 하나의 연극무대라 치고 다 공감한 척 이해하는 척 참으며 다 할 수 있다. 어차피 퇴근하거나 심지어 퇴직하고 나면 아예 사라질 세계니까. 그런데 그런 생활을 가족, 그것도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 앞에서 하라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이처럼 가장 어려운 것이 가족이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유행인데 공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보면 가장 문제라는 생각도 했다. 자식을 낳아보고서야 자식을 잃은 사람의 슬픔 진정 공감할 수 있다. 군대를 겪어본 사람만이 군대 다녀온 다른 사람의 사정을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죽이 잘맞는 부분이라면 서로 공감하며 함께 헤쳐나갈 수 있겠으나 죽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갈등이나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갈등을 헤쳐나가는 방법이 그저 상대방의 입장에 마냥 공감하는 것이라고? 부부 사이의 공감은 정말 중요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갈등 상황에서의 공감은 싸움을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싸움을 멈춘 다음에야 서로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내며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래서 공감이 중요하기도 하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 그 갈등의 씨앗이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곪아가는 상처를 그저 반창고로 가린 것이 될 수 있고 향후 서로의 유대감을 헤치는 위험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잘한 부부싸움은 일종의 곪아가는 상처를 도려내는 수술과도 같다. 곪아가는 부분을 터뜨린 후 서로 받은 상처를 나누고 화해하는 과정은 서로를 더 알아가고 노력하는 계기이자 그 자체가 서로에 대한 솔직한 터놓음과 그로 말미암은 공감을 전제한다. 여기서의 공감은 서로 달랐던 입장에 대한 공감이라기 보다는 결국 자신들이 부부로서 함께 해가는 모든 삶의 여정이 결국 서로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깊은 공감이다. 서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깊이 공감하고 나면 갈등했던 부분은 싸움의 계기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로 바뀌어 서로의 이성을 최대한 사용해 어떻게 서로에게 맞춰갈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더 깊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갈등을 딛고 함께 노력하는 모습은 공감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공감은 한 단어 안에 여러 면모를 내표한다.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끼리 서로 통하는 마음이 감정적인 공감이라면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끼리 가지는 유대감은 감성적인 공감이다. 그리고 목표가 같은 이들끼리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은 이성적인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공감은 세 종류다. 감정적인 공감, 감성적인 공감, 이성적인 공감. 그리고 부부싸움에서 필요한 공감은 감성과 이성의 공감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 잘살기 위해 결혼한 것이라는, 결혼의 초심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감성과 서로 더 잘살기 위해 앞에 놓인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성이 모두 작동한 공감 말이다.
아마도 우리부부가 지금까지 다소 싸우더라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또 서로 푸닥거리를 하다가 얼굴을 붉히고 마음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싸움의 목적이 '문제 해결'임을 서로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좋은 부부싸움은 어떤 기술이라기보다는 '싸움의 뼈'가 무엇이냐에 있는 것도 같다. 뼈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가 분명한 것처럼 우리의 관계 속에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뼈가 존재한다. 부부싸움의 뼈가 자신의 승리이거나 서로에 대한 제압이라면 그 싸움의 뼈는 각자의 흉부를 찌르게 되어있다. 일반적인 싸움은 상대방을 이기거나 다치게 하는 것이 싸움의 뼈인지라 서로에 대한 결별이나 일방의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끝난다. 부부싸움 역시 제압에 대한 의지를 싸움의 뼈로 한다면 이혼이나 상처로 결말이 치달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고 나서 웃음을 주는 싸움은 '문제 해결'을 뼈대로 두고 각자의 말발이나 논리, 그리고 더 나은 우리 가족을 생각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몸체를 이룬다. 그 뼈는 내장을 지키는 갈비뼈처럼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마음을 지키고 원래 갈등의 원인이었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싸움을 이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이다. 상대방을 이기고 내 발아래 두어 기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한 편으로 가장 기쁜 기억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를 기쁘게 하려 노력하던 순간이었거나 그런 노력으로 그가 기쁨에 젖을 때 우리는 가장 행복했다. 헌신 그 자체가 행복이 되는 그런 장면을 보고 우리는 말한다. 아, 저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돌아보며 고백하건대 나 역시 사랑이 부족한 싸움을 과거에 많이 했고, 지금도 간혹 그런 싸움을 걸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 배경에는 망각이 있다. 내가 언제 제일 행복했는가에 대한 망각. 또 그녀에게 사랑받았을 때의 감동과 행복의 충만감에 대한 망각. 망각은 보상심리로 이끈다. 내가 그녀에게 잘해주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존재는 나였다는 것을 망각해 나의 잘한 점에 대해 그녀가 마땅히 감사하고 나에게 일종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며 싸움을 걸었던 때가 있던 것 같다. 그런 싸움은 동물처럼 굴복과 복속을 종용했다. 사람이 동물이기에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고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서운함에 젖어 지난날의 나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게 싸움을 걸 수도 있다. 서로가 잘났다며 우겨대고 언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싸움을 걸었을 때 상대방이 보이는 서운하고 슬픈 표정을 본다면 사랑의 자리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아니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의 슬픔을 보고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과학이 발달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명백한 것들도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이타적인 본능이 있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보람을 느끼는 삶이 있어야 우리가 지속가능하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를 위해 살지만 남을 위한 삶도 함께 할 때 진정 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너와 나, 그 사이 과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명사가 하나 있다. 우리. 우리는 너이기도 하고 나아기도 하며 너와 나로 분리해 부를 수 없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라는 존재가 나아가야 할 정답이 무엇인지는 1+1=2처럼 똑 부러진 답을 내릴 수 없다. 부딪힐 수밖에 없고 때로 싸울 수도 있다. 우리를 위한 길은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내는 것이 당신을 위함이고 또 나를 위함이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서로만이 깊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둘에게 갈등이 생길 때 그 갈등이 서로를 찌르기보다는 서로를 지킬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부부싸움의 기술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내 마음과 마음의 진정성에서 우러나온 깊은 생각, 또 그것들로 함께 만든 사랑의 이야기다. '내가 잘하면 상대방도 잘해야지.'라는 거래의 마인드보다는 둘이 함께 '나만 잘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서로 잘해야 한다.
요컨대 둘의 깊은 사랑만이 가장 현실적인 부부싸움의 기술이다. 단순하지만 쉽지 않고 허무하지만 공허하지 않다. 긴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다시 '결혼은 사랑만이 현실이다.'라는 문장으로 회귀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저 사랑하라는 말은 공허하지 않아도 막연하지 않은가? 사실 구체적인 방법은 나도 모르겠다.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사랑은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정답을 제시하기도 힘든 대상이다. 향기가 좋은 냄새임은 명확하지만 뚜렷하게 어떤 냄새라는 것을 정의하기 힘든 것처럼 사랑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웃음, 눈물이 섞인 감동적인 이야기임은 확실하지만 뚜렷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부부싸움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런 말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 글쓴이의 경험을 섞어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싸움은 자신도 모르게 시작되니 싸움의 기술이 필요한 순간은 싸우는 도중일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싸움이 시작되더라도 싸우는 도중 문득 상대방에게 고맙고 미안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내가 잘했고 저 사람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멈출 것이다. 저 사람을 지키고 싶던 나 자신이 떠오르면서 이기고 싶다기보다는 지키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과 있던 일 중 가장 기뻤던 일을 떠올려보자. 아마 나로 인해 상대방이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를 것이다. 상대방에게 해코지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누그러질 것이다. 그 깊은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물어보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뭐지?'라고 되묻고 그 문제에 집중하자.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집중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고나면 어느 화해를 마치고 나서 상대방의 머리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 말해주자.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싸움을 또 다른 계기삼아 사랑스러운 서로의 이야기를 계속 생산해 보자. 그 이야기로 깊어가는 사랑이 부부싸움을 잘하는 가장 좋은 기술로서 계속 다듬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