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단편적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IT 회사 앱 개발자인 석진 씨. 수많은 도전 끝에 힘겹게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5년간 사귀던 여친과 결혼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맞벌이 부부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지내왔다. 부모님은 은근히 손주를 기대했지만, 계획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프 선희에게 날아온 톡~. ‘오빠! 몸이 좀 안 좋아 병원에 다녀왔는데, 임신이래!’.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에 기쁜 마음도 잠시. 선희를 위해, 그리고 태어날 아이를 위해 뭐 근사한 게 없을까? 하지만 지도 앱 개발이 한창이라 이것만 마무리되면 서프라이즈한 선물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모처럼 만에 칼퇴근한 날. TV를 켰더니 채널마다 온통 해외여행 홈쇼핑 상품이 난리다. 문득 머리를 스쳐 뭔가 지나갔다. 그래 태교 여행. 코로나로 신혼여행도 제주로 다녀왔는데, 이참에 해외로 가볼까나?
평소 해외 출장이 잦았던 터라 항공사 마일리지도 넉넉히 쌓여있고, 임신 20주 차라 안심도 되었다. 마침 길고 긴 프로젝트도 끝났다. 스페인행 항공이며, 마드리드 호텔, 그리고 렌터카까지 일사천리로 예약을 마쳤다. 이제는 그날만 오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석진 씨! 그동안 지도 앱 개발하느라 고생 많았어. 근데 개발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그룹사에서 감사가 나온다지 뭐야. 감사결과를 보고 론칭한다는데... 안됐지만 스페인 여행은 감사 이후로 미뤄야겠어! 미안하네’
출발 이틀 전 날벼락을 맞았다. 태교 여행은 20주에 가는 게 국룰이다. 항공권은 마일리지로 한 거라 못 가면 그냥 날아간다. 호텔 취소 수수료도 50%다. 여행지, 맛집, 관광지 검색을 위해 밤잠도 못 잤다. 들떠있는 선희에겐 뭐라 하지?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래. 나도 이렇게 물러설 수 없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너무나 괴로워 정신건강진단의학과에 갔더니 급성스트레스란다. 그래 괴로우면 회사에 고충을 넣을 수 있지!’
다음날 석진 씨는 인재개발팀을 찾아가 고충 신고서를 제출했다!
석진 씨는 무사히 스페인에 갈 수 있을까?
흔히들 괴롭힘을 성희롱과 비교한다. 주관적인 불쾌감, 굴욕감이 있으면 성희롱인 것만큼 내가 괴로우면 괴롭힘이 될 거라고. 과연 석진 씨의 생각은 맞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석진 씨의 사례는 괴롭힘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회사가 금지하는 괴롭힘은 우위성 이용, 업무상 적정범위 초과, 신체적·정신적 고통 또는 근무환경 악화의 세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근로기준법 제76조의2).
먼저 팀장의 휴가 일정 변경지시로 석진 씨는 감사에 임하느라 휴가를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즉 팀장의 지시로 석진 씨는 감사를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우위성은 인정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지도앱은 감사 이후 론칭 여부가 결정된다. 문제는 이것이 회사 입장에서 석진 씨의 태교 여행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휴가 변경지시가 업무상 적정한 범위를 넘어서 이뤄져야 한다. 지도앱 론칭의 시기, 감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와 그 목적, 그리고 긴급한 사정 때문에 휴가를 변경한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업무상 적정성). 석진 씨의 사례에서 감사의 이유가 ‘개발과정에서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고, 업무상 필요 때문에 휴가 사용이 미뤄진 사례가 있다면 팀장의 지시는 적정한 수준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석진 씨의 급성스트레스는 팀장의 휴가 일정 변경지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석진 씨의 스트레스가 휴가 변경지시로 인한 것이라고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팀장과 석진 씨의 평소 관계, 팀장과의 면담 이후 석진 씨가 보인 반응, 팀장의 휴가 변경지시가 일회적인지 계속적인지 등의 구체적인 것들도 살펴보아야 한다. 사례에서 팀장의 지시는 일시적이므로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물론 행위가 지속해서 있어야만 괴롭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석진 씨는 괴롭힘을 호소하며 신고를 하더라도 팀장의 휴가 변경지시는 업무상 적정한 범위 내에서 이뤄진 것이므로 근로기준법에서 금지하는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 기분 나쁘다고, 괴롭다고 해서 모두 근로기준법에서 금지하는 ‘괴롭힘’은 아니다. 행위가 우위에 의해 이뤄져 저항할 수 없었는지, 업무상 적정한 범위 내에서 이뤄졌는지, 행위로 신체적·정신적 고충이 생겼는지 그 외 다른 요건들도 살펴봐야 한다.
이처럼 괴롭힘에 관한 법률적 판단은 쉽다. 고성을 질렀다. 모함을 했다. 험담했다. 나를 둘러싼 악소문이 퍼졌다. 인격을 모독했다. 크리넥스 휴지곽을 던졌다는 단편적인 상황만 갖고 괴롭힘 여부는 결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