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유독 손길이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졸업과 입학 사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주눅 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때.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보다, 단지 이렇게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그래도 너, 꽤 잘 해내고 있어.”
나는 그 시기가 조금, 아니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여파는 곳곳에 남아 있다.
‘돌봄’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 그땐 몰랐다.
단순히 “어화둥둥” 해주는 게 돌봄일까?
아니면, 알아가고, 이해하고, 배워가는 과정일까?
나는 어설프게 주워들은 것들로
어설픈 방식으로, 내게 돌봄이라는 걸 흉내냈다.
그리고 그걸 최고의 돌봄이라고 믿었다.
내가 내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무너졌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후에야 깨달았다.
‘아, 이건 돌봄이 아니었구나.’
돌봄이 아니라, 발버둥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쓴 가면이었고,
누군가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만든 각본이었다.
어른들의 사랑은 종종 말과 행동이 어긋났다.
사랑한다면서, “너희가 싫으면, 네가 싫으면 안할게 약속해.”라는 말로 마음을 안심시키며,
결국 결정은 늘 그들이 했고,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곤,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 아님을 끊임없이 말하며 순응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그 통보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자기주장의 힘이 약해져만 갔다.
그렇게 내 마음은 조금씩 상처를 입었다.
아니, 아마 내 마음은 매일, 매주, 매달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나 좀 돌봐줘.”
“기댈 곳이 필요해.”
“제발, 나를 조금만 봐줘.”
사실은 너무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욕구를 너무 오래 외면했다.
사랑받고 싶고, 안기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내 마음 하나쯤은 누군가 봐줬으면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 욕구.
그걸 꺼내는 데 걸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말을 제일 먼저 들어줬어야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지금에서야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좀 더 일찍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내가 왜 그렇게 아팠는지
조금은 덜 헤매지 않았을까?
어느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아니 많이 너무 많이 아팠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 외침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을 내 마음에 건넨다.
“그때 그 외침을 이제야 들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크게 외쳐줘서.
그 덕분에 나는 이제야 깨달았어.
나는, 나를 참 많이 아끼는 사람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