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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May 29. 2024

옛 썸남, Y에게

그립다 말을 할까?

"똑똑똑" 

초저녁, 노크소리에 내가 당직실문을 열었을 때.

해맑은 사람, 당신이 활짝 웃고 서있었죠.

당신은 흰 종이에 쌓인 보퉁이 하나를 내게 내밀었지.

받아 든 내 손바닥이 금세 따끈해졌어.

고소~~~ 한 통닭냄새가 병실 복도에 진동을 했고.


"이거 식을까 봐 엘리베이터를 못 기다리고 계단으로 올라왔어요."

숨이 턱에 차서 말을 뱉으면서도 당신 눈이 반짝반짝했죠.

7층 직원숙소까지 헐레벌떡 뛰어올라온 젊은이, 당신  Y!


바야흐로 36년 전 일이군요.

대학병원 수술실 간호사가, 당직날 숙소에서 불쑥 통닭선물을 받던 날.

당신을 선채로 돌려보내고, 난 당직파트너 선배와 따뜻한 통닭을 나눠먹으며 까르르까르르 웃음만 헤펐던 시절이었죠.


내겐 진지함이라곤 1도 없이, 당신을 좀 신기하게만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인연이 안 될려니까 그렇게 마음이 동하질 못했을까?

비현실적일 만큼 순수하고 준수한 청년을 왜 그렇게 가볍게만 대했을까.


당신의 정성 어린, 가슴 뭉클할만한 일화들은 더 많았죠.

가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당신은 한약을 지어왔고, 또 고향의 산에서 밤이 많이 난다고 토실한 밤을 한 아름 가져오기도 했고요.


어느 날  "Y가 신사복을 입으면 어떨지 궁금하다." 내가 이런 말을 했고, 보름쯤 지났을까? 

당신이 카키색 신사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타나서 날 놀래켰죠.

참 멋지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공부하느라 좀 늦게 군대에 갔지요.

진지함이 없던 는 그리움도 없었고, 우리의 썸은 그게 마지막이 됐어요.

예정에 없던 나의 속성결혼도 단절의 이유가 됐겠지요.




그 후, 36년을 살면서 당신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우리의 인연이 길게 이어졌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갑자기 결혼을 하고 관계의 고단함 속에서 헤맬 때도 어김없이 당신 생각을 했었죠.


순결하고 순수했던 사람의 진심을 가벼이 흘려보내고 '허당을 짚은 것이로군'하고 나를 비웃기도 했었고요.

왜 그렇게  눈부신 시절을 의미 없이 보냈을까? 

지나고 보니, 그냥 흐르는 세월에 나를 맡기고 젊은 날들을 보내버린 것 같아요.


Y! 난 그 시절이 그리워요.

그러나 기회를 준다 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군요. 

남자들이 군대 두 번가기 싫은 것과 비슷한 이유죠. 하하.

인생은 모험과 같아 꽃길만 걸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겪고서 또다시 콜은 없다!


Y! 우리 그 시절처럼 화사한 여생을 기도해요.

나는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부칠 수없는 공허한 편지를 또 세월에 맡기고 안녕!!!


2024년 5월 29일 / 옛 썸녀 L이 보냄.


그리움 꽃말을 가진 꽃들 / 일부출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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