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너의 16년을 내가 쓰는 거.
우리는 대문이 열두 개 달린 집을 떠났다.
엄마가 살고 싶은 집으로 지었던 예수병원 앞집을 팔고 아주 고요한 동네로 이사를 왔다.
크고 오래된 나무가 많고 아파트 뒤쪽 그늘엔 이끼밭도 있고, 앞마당엔 햇빛이 많아서 산책하다가 엎드려 자고 싶은 동네다.
엄마는 지금도 전화를 많이 하고 약속을 하고 중요한 일을 하러 다녀온다.
그렇지만 옛날처럼 씩씩하고 예쁜 목소리로 전화하면서 새벽에 일하러 가던 모습이 아니다.
무겁고 쓸쓸한 목소리에 엄마의 결심이 느껴진다.
엄마는 지금도 짐을 버리고 있나 보다.
엄마가 책임져야 할 짐을 버리고 가벼워질 때마다, 엄마의 마음속 악당은 도망을 치는 것 같다.
엄마는 조금씩 잘 자고, 집에서 밥을 잘 먹고,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랑 산책하는 길은 대부분 아파트를 크게 두 바퀴 돌아서 오는 길이다.
어쩔 땐 멀리 강물을 따라 걷고 올 때도 있지만 그럴 땐 다리가 아프다.
나도 이제 열두 살이라, 병원에 가면 선생님이 사람나이로는 팔십 살이라고 노견이라고 했다.
그땐 기분이 나빴는데, 멀리 가면 숨도 차고, 다리가 아프고, 피곤한 걸 보면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매일 두 번 산책을 나가는데 엄마는 가끔 불쌍한 꽃들을 주워서 나와 함께 집으로 온다.
뿌리가 말라서 시들고 죽은 것 같은데, 우리 엄마가 씻어주고 예쁜 화분에 심어서 물을 듬뿍 주면, 살아나서 예쁜 꽃을 피운다. 엄마는 요즘 집 짓는 일은 버려가면서 꽃부자가 돼 가고 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뒤로 엄마가 이 동네 할머니들처럼 한가해졌다. 난 좋다.
엄마가 새벽에 일하러 안 가는 것도, 엄마생각은 잘 모르지만, 난 좋다.
이제 무뚝뚝한 얼굴로 전화하는 일도 거의 없고,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는 일도 없어진 것 같다.
난 엄마가 돈을 많이 벌지 않고, 조금 가난해도 괜찮다.
내 밥과 약, 그리고 엄마 밥하고, 또 얼마나 돈이 필요할지는 잘 몰라도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지금처럼 엄마가 나랑 많이 놀고 바쁜 전화를 안 받으니까 참 좋다.
엄마가 새벽에 일하러 갔다가 지쳐서 피곤하게 집에 돌아올 때는 참 안 좋았다.
이제 엄마가 돈 버는 일, 힘든 일 그만하고 안 바쁜 엄마가 되면 좋겠다.
우리 오빠도 이 동네가 좋다고 했다.
오빠가 집에 오면 난 오빠하고 산책을 다녀온다.
그러면 엄마가 맛있는 밥을 해서 오빠랑 다 같이 먹고, 한 숨자고 또 산책을 간다.
엄마와 오빠생각은 어떨지 몰라도 난 매일 이렇게 살고 싶다.
이제 엄마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병이 나았다.
엄마는 엄마의 병을 알았고, 그 병을 고칠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이 엄마를 살게 한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다시 일하고 돈 버는 짐을 안 졌으면 좋겠다.
엄마의 일은 짐이 너무 무거우니까!
너무 무거운 짐은 엄마의 마음속에 악당을 키우니까!
그러면 또, 아이쿠!
생각도 하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