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Mar 28. 2024

마누라가 죽도록 사랑하기

평행선이 어그러지다




날씨는 잔뜩 내려앉았고, 내 마음도 그따위다. 이런 날엔 ‘날궂이’라고 있다. 흐린 날, 비를 핑계 삼아 몸은 물론이거니와 마음까지 풀어놓고 쉬는 날이다.      


모처럼 사회에서 친하게 지내는 벗을 만나 놋그릇 막걸릿잔 앞에 놓고 홀아비 삶에 대한 넋두리를 부럽게 듣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아내 먼저 보내 놓고 외롭다고, 외롭다고, 외롭다고 전혀 외롭지 않게 자랑질하는 벗이다.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행복의 씨앗을 심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벗을 만나면 계산은 내가 한다. 벗한다는 것은 형제처럼 우애한다는 뜻임을 알고 실천하는 중이다.  

    

헛소리할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초자연계가 에너지를 방출하는 활기찬 소리가 아니라, 공포의 씨앗이 가슴에 파고드는 음울하기 짝이 없는 떨림, 이 떨림만 들어도 누군지 감으로 알 수 있다. 주변 환경으로 인해 촉이 진화를 거듭한 까닭이다. 역시 나의 벌꿀오소리다. 그런데 평소 목에 가시 박힌 음성이 아니었다. 기력이 달려 다 죽어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런다.      



비오는 날 이 집 파전 정말 맛있다. 이름하여 남궁!


“자기 언제 들어와요?”


‘자기?’ 우왓! 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자기인가! 도자기? 청자? 백자? 분청사기? 그래도 티 내지 않고 무겁게 물었다. 오빠 소리는 죽어도 못하지만, 자기소리를 한다니? 지구가 꺼꾸로 도는가? 내가 지금 꺼구로인가!


“와, 뭐, 왜요?”

내가 생각해도 퉁명 그 자체다. 평소 같았으면 대번에 전화를 끊었을 법한데 저 먼 곳의 그녀는 절박한 듯하였다. 평소 말이나 행동이 현실을 뛰어넘었다면 그 잉여분은 절박할 때 쏟아지게 마련이다. 역시 그랬다.     

“몸살인가? 아니면 배탈이 났는지 아파 죽겠네요!”


오! 죽겠다는 말이 반갑다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당장은 죽지 않을 만큼 아프다니 안심이다. 그러나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쩜 목소리가 신선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해두자. 솔직 하자. 쾌재를 부를 수 없지만, 손뼉은 치고 싶었다. 그 까닭이 있다. 우리 집 벌꿀오소리는 몸이 아프면 무진장, 전혀 딴 사람인 양 얌전하다 못해 새침데기로 변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얌전하고, 차분하면서, 지혜롭고, 조용조용 한 사람이라면, 몸이 아프면 평소와 달리 짜증도 내고, 성깔도 부린다고 하더라만, 나의 벌꿀오소리는 아시다시피 평소에 매우 출중하게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 소유자인 만큼 성격도 행동도 그러한지라, 그와는 반대의 상황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변명컨대 그렇다고 나는 나쁜 남자가 절대로 아니다.

     

기실 애들이랑 즐겁게 잘 지내다가도 뭔가 수가 틀리다 싶으면 화살이 바로 내게 돌아와 악을 쓰며 꽂힌 채 부르르 떠는 경험을 하곤 한다. 지난날 케케묵은 과거를 들춰내, 도무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것을 소환시켜 마음의 포승줄로 꽁꽁 묶어버리는 신기를 선보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어찌 그리 자질구레한 것까지 잘도 입력하고 있는지, 단언컨대 기억의 창고가 스무 배는 넓지 않을까 의심한다.    

 

그렇다고 나는 그냥 당하고만 마는, 마음이 평평한 남자가 못 되었다. 본능처럼 불꽃이 튀며 한판 붙게 되나, 결국에 화상을 입는 쪽은 나다. 그녀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내 마음의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백년이 지난 다 해도 황하(黃河)의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듯, 우리 벌꿀오소리가 그렇다. 하나 더 문자를 쓰자면, 백두여신(백두여신)이라,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살았으나, 여전히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시나브로 당하는 것이 일상이라, 두 손 모아 싹싹 빌진 않지만, 좋은 게 좋다는 식, 지는 것이 이기는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정신승리법’으로 피하길 여러 해다. 아이들 보고 내가 참는다. 하면서, ‘저 여편네는 원래가 성깔이 그래….’ 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벌꿀오소리랑 계속 이따위로 살다가는 해탈의 경지를 경험하거나, 소크라테스에 버금가는 철학자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생각하길 여러 해다.  

    

각설하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밥 챙기고, 냥이 물통 씻어서 갈고, 밀린 설거지,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하고 돌아섰다. 이때 뱃살, 아니 나의 벌꿀오소리가 뱃살을 움켜쥐고는 평소 가로로 찢어진 눈이 휑하게 해서 설설 기다시피 들어온다. 나는 억수로 안 되었다는 동정의 눈길을 연기 삼아 보내고 나니, 닭살이 돋는다. 마음속으로야 기분이 뭐 그리 나쁘지 않아도, 그래도 말은 해 줘야지 어찌 그냥 있을까.     



울집 귀염둥이들. 호두와 카니




“약은 사 먹었어요? 병은 갔다 왔나요? 아이쿠! 이런 미련한 사람아, 약이라도 사 먹지요.”

“대충 먹긴 했는데 효과가 없네요. 아픈 것은 똑 같네.”

“원래가 인생은 고해의 바다예요. 그냥 견딜 수밖에….”

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또 개똥철학을 쓸데없이 소릴 지껄였던 것이다.

“지금 그 말이 하고 싶어?”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힘이 달리는 듯 얼굴에 하얀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아니, 나는 그냥 당신이 안타까워서…….”

라며 입에 발린 소리 마구 쏟아붓고 있는데, 화장실로 배를 웅크리고 가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어서 뱃살을 움켜쥐고 나온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아! 씨 보험 큰 거 들어 놓을걸.’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큰방으로 들어가 이불 깔고 눕더니 불쌍하게도 덜덜 떤다. 머리에 열이 펄펄 끓고, 무슨 음식 잘못 먹었는지 뱃속이 요동을 친다고 모처럼 내게 구원의 눈길을 보낸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해 줄 것도 없고 해서 수건 물에 적셔서 이마에 대주는 시늉만 하자, 손수 받아 들더니, 황비홍처럼 넓은 이마에 착하고 붙인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큰맘 먹고, 냉장고에 상비약 해열제 물약 남은 거 가져와 덩치에 맞게 먹지 않으려고 내숭 떠는 걸 억지로 세 숟갈 먹였다. 그러고 나니 신기 하게도 열이 싹 가시는 거 있지. 에이 씨!!!


해삼 지푸라기 만나 퍼지듯이 흐물흐물 해진 채 잠이 들었나 보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평소 이처럼 얌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때다. 침대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켜고 유럽 축구리그 중계 재방송 새벽까지 보는 기염을 토했다. 이쯤 되어야 벌꿀오소리의 꿈자리가 제법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배틀배틀 하면서 집을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는 밥 대신 포스트(아! 특정 브랜드를 언급해 죄송합니다.)에 요구르트 섞어서 퍼먹기 시작했다. 대충 씻은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부럽긴 하겠냐만, 정녕 알 수는 없다. 평소 벌꿀오소리 피지컬이 보통이 아닌 까닭이다. 해서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해야 했다. 무릇 가족이란, 멀리서 박수 쳐주는 관계다.     


“오늘도 나가려고요?”

“…….”

갈등 중인 거 다 안다. 휘몰아쳐야 한다.

“바깥세상이 벌꿀오소리 없으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생기나요?”

츱~~!! 내가 생각해도 닭살이다.


이쯤에서 그만해야 했다. 진짜로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큰일이다. 대충 옷을 걸치고 비실비실 나가는데 물 한 모금 건네주니 긴 목을 빼고선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얌전히 흔든다. 하이고 생소해라!    

 

승강기가 도착했다는 음성이 들렸다. 드디어 아내가 집을 나갔다. 마음의 일기예보가 화창과 쾌청을 알렸다. 이처럼 기분이 좋다. 텅 빈 집이 이처럼 넓고 훤하게 밝다. 거실에 대형 스피커 브루투스 연결해서 좋아하는 음악 크게 틀어놓고 춤을 췄다. 냥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본다. 대충 음악 열 곡 정도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줄기가 후끈거리며 땀이 찬다.


창밖을 보니 비가 장맛비처럼 내리붓는다. 스테인리스에 물 떨어지는 소리까지 흥겹다.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린다. 더 정겹다!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몸을 깨끗이 씻은 후 말끔하게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다. 아무리 봐도 잘생겼다. 안성기보다, 정우성보다는 못생겼지만 말이다. 우산에 떨어지는 경쾌한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면서 걸었다. 가는 길에 고미술품 전시회가 열린다고 해서 들려 감상하였다. 대충 복사본이 여럿 보인다. 그러나 소장자는 진품이라 거품을 문다. 그리고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름답다. 무척 예쁘다. 내겐 그림의 떡.

작업실에 도착해 손가락 아프게 자판을 두드리고, 눈이 아프게 책을 읽었다. 띠동갑 아우와 늦은 점심을 먹으며 반주로 소주 한 병으로 나누어 마셨다. 비 오는 날의 추어탕이 이마에 땀을 흐르게 하였다.    

  

작업실에서 재차 글쓰기에 돌입하려 하였으나 잠이 몰려들었다. 생리현상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전화가 경쾌하게 울린다. 광고 기획실 운영하는 선배다. 목적은 딱 하나, 술시가 되면 술 마시자는 연락이다. 그러나 나의 벌꿀오소리 얼굴이 떠올라 일언지하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벌꿀오소리가 들어온다. 본능처럼 얼굴이 굳어져 이렇게 말했다.   

  

“와이 일찍 오는데요?”

“일찍 들어와서 싫단 말인가?"‘

아차! 본래의 힘으로 돌아온 듯하다. 급하게 수습.

“아니요, 잘 왔다요! 몸은 좀 좋아졌나요?"

“쫌 좋아 질라 하는데 점심으로 다들 얼큰해물국수 먹는다 해서 같이 먹었더니 또 아파요!”     


정말 잘 되었구먼, 누군지 몰라도 아주 잘했네. 속으로 중얼중얼 하면서 아들이랑 비빔밥 만들어 고추장 넣고, 된장찌개 두부 건져 넣고 보는 앞에서 쓱쓱 비벼 먹으니 그 맛이 꿀맛이다.


앞에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거 보니 조끔은 안 됐다마는, 더 약해지면 안 돼. 그래도 척은 해야 했다. 지나가는 말로 콩나물죽 끓여줄까요? 물었더니 아무 대답도 없이 불 꺼진 방으로 쓸쓸히 사라진다. 그렇다고 약해질 내가 아니다. 속으로 ‘먹기 싫으면 말든가’ 했다.     


저녁 먹은 설거지를 끝내고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때다.

“죽 끓여준다 하고선 안 줘요?” 한다.

아뿔싸! 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안 먹는다면서요?” 하니,

“언제 안 먹는다고 했어요, 아무 말도 안 했지!”

“…….”


우랄! 그게 그거지.     

어쩔 수 없다. 남아일언 금과 동질이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콩나물 대가리 떼고 다듬었다. 냄비에 참기름 두르고 콩나물 달달 볶다가 남은 밥 넣고 소금 넣고 팔팔 끓였다. 향기가 집에 진동한다. 그런데 나의 벌꿀오소리가 잠이 들었다. 잠에 취한 오소리 깨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구 흔들어 깨우자, 해롱해롱 헤맨다. 큰소리로 귀에 대고 소리쳤다.

“죽 드셔요!”


평소 같으면 소리친다고 생난리 굿을 하였을 법한데, 비실비실 몸을 일으킨다. 호반에 콩나물죽이 맛있게 놓였다. 나의 벌꿀오소리는 덜덜 떠는 손으로 숟가락 가져간다. 에구, 재밌어라!!!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모처럼 하늘이 맑다. 저녁에 만들어 놓은 죽 한 사발 덥혀서 먹이고, 남은 죽 내가 먹으려고 하는데 이런 젠장! 보온 도시락에 담아간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다.     


일거리 핑계 삼아 휘적휘적 사무실 몇 군데 들리고, 어제 하루 쉬었다고 남산동 막걸리가 생각나 몇 순배 걸치는데, 일 끝났으면 함께 들어가자며 전화가 왔다. 뱃살을 움켜잡고 운전하는 옆 조수석에 편하게 앉아, 쿰쿰한 막걸리 냄새 팍팍 풍기니 기분도 좋다! 이참에 할인점 들려서 시장 보자고 하니 승낙한다. 그 봐, 얼마나 얌전한가. 이 기분, 이 느낌 오래 지속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간혹 배를 움켜쥐기도 하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시식할 거 다 하면서 여유 있게, 그리고 문어, 낙지, 새우, 전복, 쇠고기, 청경채, 미나리, 팽이버섯, 초벌부추, 숙주 등 푸짐하게 시장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었지만, 샤브샤브 종류별로 장만해서 맛있게 먹었다. 


벌꿀오소리가 침을 꼴깍 삼킨다. 나는 ‘아이고, 맛있어라!’를 연발하며 싸구려 와인 반주 삼아 배불리 먹고 돌아서자, 벌꿀오소리가 냄비에 조끔 남은 국수 깨작거리는 거 보니 조끔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났다. 화창한 날씨답게 일찍 일어나더니 이런젠, 씩씩하게 집을 나간다. 나는 콩나물국 끓이고 집에 남은 재료 넉넉하게 넣고 김밥 말아서 아침을 해결하였다.      




아무래도 쾌차한 듯한데, 이 일을 어찌할꼬??? 다시물 상한 거 버리지 않고 쪼금 남겨 놓았는데, 이걸로 정성스럽게 죽 끓여서 한번 보내봐? 라며 농담처럼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양심을 실험대에 올릴 필요가 없었다. 막 글 끝내고 남은 김초밥 먹고 있는데 벌꿀오소리가 들어오더니 고대로 콕, 꼬꾸라진다. 우 왓! 이런 신비로운 일이 연일…….     


“아직도 아파요?” 했다.

“식당에서 서비스라며 탕수육 큰 접시에 줘서 욕심부려 둘이 다 먹었더니 또…….”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아무리 킹코브라도 산채로 씹어 먹는 벌꿀오소리라곤 하지만, 먹을 거, 먹지 않을 거는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인가를 직시하고, 절제할 줄도 알아야 지혜로운 자다. 인내는 덤이다. 그러나 나는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먹고 싶은 건 먹어야죠. 아~~~ 주 잘했어요! 그만 일찍 주무셔요.”     


‘절제와 함축의 고요함.’

고 최순우 선생의 표현이 지금 내 맘이다.

이 행복하고도 즐거운 상태가 얼마나 갈까? 부디…….

으, 흐흐!!!     


(쓰다보니 또 길어 졌다. 호흡을 좀 줄여야 할 터인데...ㅠㅠ..)

이전 19화 ‘오빠!’라고 불러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