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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Nov 07. 2024

플라톤 '국가'

독후감, 너 오랜만에 쓴다




플라톤이 쓴 『폴리테이아(국가)』는 공자의 『논어』가 그랬듯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표현되어 있어, 어디까지 플라톤의 사상이고, 소크라테스 생각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정의에 대해서’ 부제처럼 정의로운 삶이란 굵직한 주제에 정치철학과 이데아론, 형이상학, 음악, 미학, 교육, 인식론 등 여러 분야를 대화 형식으로 풀었다. 


플라톤은 정의를 국가와 개인으로 구분하였다. 인간의 구조와 정치체제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낸 다음 그를 바탕으로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개념이다. 즉 국가의 정의가 대문자라면, 개인의 정의를 소문자로 보고, 국가의 정의를 앞서 다루고 있다. 


국가를 통치자의 지혜와 용기의 덕이 충만한 군인(전사)계급의 조력자, 그리고 생산자 계급이 조화와 분별로써 하모니로 뿌리내려 꽃피우는 것이 ‘정의’다. 저마다 소임을 다할 때 이상 국가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이른바 왕도정치, 즉 철인정치를 통해 그를 따르는 용감한 군인은 외적을 막고 내란의 분규를 통제하면서, 생산자 계급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전체가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재능을 발휘해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국가가 가장 정의로운 이상적인 국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 국가라 할지라도 통치자 명예 지상주의가 이성의 통제를 넘어 섰을 때 통치권을 악용해 사회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사익의 욕망으로 과두정을 부르고, 극심한 사회불안 속에 민중봉기로 이어져 민주정을 향하지만, 저마다 욕구를 분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해 옳음과 그름의 사회적 구조가 붕괴한다. 부의 추구는 개인 역량과 적성이 무시되면서 분열이 만연하고, 최악의 독재정인 참주정을 부른다.


개인도 다르지 않다. 저마다 영혼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세 가지, 이성과 기개와 욕망이 조화를 이루는 정의가 그것이다. 지혜의 덕, 용기의 덕, 절제의 덕이 조화로울 때 정의의 덕을 갖춘 이상적 인간이라고 하였다. 이성의 기능이 약하거나, 기개가 넘칠 경우 영혼의 조화를 잃게 된다. 이성의 기능이 마비되면 앎의 결핍을 부르고, 악의 원인인 무지하게 된다. 영혼의 조화가 곧 정의라는 뜻이다. 



 현대적 의의


플라톤의 핵심 철학은 정의다. 인간도, 국가도, 앎도, 현상세계를 넘어 이상의 세계로 상승해 가는 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가치라고 하였다. 국민이 조화를 이루며 정의의 즐거움을 추구할 때 정의로운 국가가 될 수 있으며, 분별과 절제를 통한 공동체가 아름답고 이상적인 나라라고 하였다. 


2,500여 년이 지난 현대에도 추구해야 할 정의를 영점에서부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러나 권력과 경제 논리를 앞세운 금력, 급부상한 언론 권력의 보이지 않는 카테고리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가운데, 과연 정의가 살아 있는가를 의심한다. 기득권층 지배담론은 은밀하게 강화하고, 비밀리에 확산된다. 권력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민중을 현혹하고 있다. 단언컨대 고려 무신정권을 연상케 하는 작금의 검찰 정권은 정의가 실종된 지 오래다. 권력 핵심에 있으면서 고속도로 노선을 비롯해, 명품 가방 수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등 이성이 욕망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은, 타락한 개인 인성에 이성은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어서다. 


“무지한 자들은 지혜를 사랑하지도, 지혜롭게 되길 욕망하지도 않는다. (중략)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결국 무지가 국가에 해악을 끼친다는 뜻이다. 영부인 김건희 특검을 거부하면서, 이슈를 이슈로 시선을 돌리거나, 핵심을 비껴가며 정의를 외치는 작금의 상황이다. 언론 권력마저 기득권을 위해 국민을 선동하고 기만하는 현실에서 플라톤이 말한 정의를 욕망이 이성을 지배하는 수준 낮은 도덕성을 볼 때 실현 가능할지 의문이다. 


사욕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속에 결국 플라톤이 말한 과두정치로 변질되면서 소수가 밀약하여 다스리는 정치체제에서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최악의 영혼, 참주정 정치체제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민중봉기로 이어지게 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지난 정권에서 촛불혁명으로 경험한 바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지혜를 추구할 일이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조차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고 하였다. 기득권은 당장의 즐거움에 가려 기억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아테네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가 한 말처럼 대한민국의 정의란, 불행히도 ‘강자의 이익’인지도 모른다. 정의란, 추상적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끝없는 앎의 추구, 영혼이 끝없이 올바름을 향할 때 가능하다. 고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역사의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역사의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도록 제 역할을 다한 ‘들사람 얼’이 중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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