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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사람이 살아가며 이어온 길에 관한 이야기 ㅣ

by 박필우입니다



길…

이 땅에 사람이 살면서 길을 만들어 냈다. 길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우마가 지나갈 수 있게 일정한 공간을 땅 위에 낸 너비’이다. 그러나 길은 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제각각이듯 길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의미 역시 남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길을 걸으며 켜켜이 쌓여가는 사연은 현재진행형이다.


길은 사람들 삶의 방식과 편의에 따라 생겼다. 장소와 행위,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나뉘는 길은 성격과 느낌을 달리한다. 시골길, 오솔길, 돌담길, 산길, 골목길, 논틀밭틀, 자드락길, 돌너덜길, 돌서더릿길, 서들길, 실골목, 비탈길, 벼룻길, 등굽잇길, 푸서리길, 외길, 미로, 기찻길, 한길, 고샅길, 경사길, 뒤안길, 사잇길, 고갯길, 지름길, 에움길, 거님길, 곁골목, 굽돌이길, 벼랑길, 신작로, 눈길, 빗길, 밤길, 새벽길 등 마치 추억을 회상하는 우리말이 정겹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사연과 사건에 따른 길에 대한 표현도 무궁무진하다. 고향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전장으로 나가는 길, 천리 길, 살아온 길, 걸어왔던 길, 앞으로 나아갈 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길, 좌절하고 힘겹게 돌아서는 길, 이별하고 쓸쓸히 걷는 길, 설렘을 안고 떠나는 여행길, 발걸음도 씩씩한 출근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둥지로 향하는 퇴근길, 난데로 떠돌던 탕아가 주춤주춤 집으로 향하는 길, 풍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떠나던 과거길,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하던 길,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쓸쓸히 내려 걷던 길, 보부상들이 등짐과 봇짐을 지고 넘었던 고갯길, 취생몽사 술에 제압당한 채 비틀거리며 걷던 길, 외세의 침략자들이 질풍노도처럼 밀고 왔던 길, 피난 길, 몽진 길, 끊겨버린 길, 걸어왔던 길, 죽어서 떠나는 마지막 길…….


길은 추억과 함께 우리네 가슴에 사랑과 희망을 주었거나 슬픔과 상처를 품고 있다. 길은 오욕의 역사와 상처와 영광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개 하나, 나루 하나에도 온갖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사연과 애환이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 특유의 슬픔까지 아름다운 서정으로 정화하는 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가 되고, 물을 만나면 나루가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힘을 그슬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지혜라 생각했다. 자연과의 조화가 가장 정직한 삶이며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다. 강제로 물길을 막으면 산이 허물어지고, 힘으로 산을 허물어트리면 물길이 분노하여 거친 숨을 토해내는 까닭이다. 지금이야 길이 산을 만나면 터널이 되고, 강을 만나면 다리가 되면서 문명의 이기를 혜택이라 여기며 톡톡히 받아먹고 살지만, 슬프게도 길이 빨라서 시간도 빠르다.



1508462351198 (4).jpg 북지장사 가는 길




길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설렘을 선사한다. 오다가다 만난 인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속속들이 삶의 진실이 숨어 있었다. 길에서 만난 세상은 화려하나 콘크리트 도시의 딱딱했던 시간들을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하는 마력이 있고, 길에서 만난 인간의 진솔한 향기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신기함이 있다. 애써 감출 것도 없는 투명모시 같은 관계는 낙담과 실의의 심정을 희망과 꿈의 여과기로 변하게 한다.


일신의 안위와 쾌락만을 일삼는 인간을 위해 유턴이라는 길이 생겼다. 열락의 대가로 되돌아가다니? 참 미련한 인생이다. 무릇 삶에 가치를 따진다면 단언컨대 그따위는 부럽지 않다. 비록 자드락길이라 할지언정 내가 가야 할 길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미래의 기억’이 바로 꿈이며 소망이라면, 그 꿈의 종착지는 결국 삶의 궁극적 목표와 같다. 그것은 착하게 살기 위함이며, 불의에 굴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가슴은 따뜻하게, 세상을 알뜰하게 살다가 행복하고, 즐겁게 죽어가고 싶은 욕심이 그것이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본다. 부모님 유전인자로부터 우러난 순진하기 그지없어 바보 같았던 길, 성장하면서 이게 아니다 싶어 작심하고 걸어왔던 이기적인 길, 그리고 인생의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문득문득 되돌아보게 하는 길도 걸었다. 머리칼이 반백을 넘어 은색으로 변하자 그 빛을 빌어 사방을 살피며 걷는 길은 더불어 사는 세상에 힘겹게 적응하기 위함이다.


이제 인생의 황혼에서 석양의 낙조를 바라보며 영혼의 안식을 찾는 그때를 달갑게 기다리며 나는 길에 서 있다. (2012)


1485247484926.jpg 고성 왕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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