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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를 받다.

by 삐아노

입학식 전에 으레 그렇듯 OT를 갔지만

선배들에 의해 강제로 소녀시대 춤을 추었던 그때의 기억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고-



다녀와서 본격적인 1학년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나 엄마나 음악학교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터라

들어오기 전까지 펑펑 놀기만 했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극성이었던 엄마도 대학 합격 이후부터는 나를 전혀 압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자유롭게 풀어주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으셨다.



1학년 담당 교수를 지정하기 전 스케일 시험을 봤더랬다.

우리 과는 예고 출신과 인문계 출신이 각 50%씩을 차지했는데, 인문계 출신이어도 중학생 때 전공을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에 비해서 기본기가 매우 부족했는데

내리 놀았던 데다가 연습도 별로 하지 않았으니

시험 결과가 처참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미래였다.

결과적으로 교수가 아니라 강사 선생님께 지정이 되었다.




보통 피아노전공은 타 전공과 달리 실기시험을 기말고사에만 본다.



학기시작이 3월이고 시험은 6월 초쯤 본다.

그런데 실기준비는 3개월 가지고는 택도 없기에 방학 때부터 준비하는 게 일반적인데(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기 시작 후에서야 곡을 정하고 악보 읽기부터 시작했으니

완성도는커녕 막판에는 암보를 하니 마니 허둥지둥 대기 일쑤였다.



책이 무겁고 비싸니 다들 이렇게 제본을 해서 다녔다. (음악도서관에도 복사기가 있었다.)
그 당시 매우 스트레스였던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


게다가 내 학번 바로 뒤에 학년에서 가장 잘 치는 언니가 있었다! 교수님들이 심사할 때 얼마나 비교됐을까 상상하며 종소리와 함께(시험 때 종이 울리면 그만 연주한다.) 도망치듯 나오곤 했다.



무대에서 즐긴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다.

즐기긴커녕 찬란한 주홍빛 조명아래 선명한 스타인웨이 마크를 보고 있노라면 긴장감으로 정신이 나갈듯해 도레미조차 치지 못할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 시기에 다른 친구는 학내 오디션에도 도전해서 학교 연주에도 발탁되곤 했는데,

그때의 나는 친구가 연주 직전 바나나 먹는 모습을 옆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다니기만 했지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수업은 또 어땠는가.


수강 신청을 잘못해서 화성학 1을 듣지 않았기에 화성학 2부터 시작했는데,

화성학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수업 내용을 도통 따라가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별세계 언어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화성학만 3년을 공부하고 캐플린, 20세기 음악 분석 등 더 상위 분석도 배웠다. 용 됐다.)



게다가 '건반 화성'이라는 수업 역시 쥐약이었다.

화성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연주해내야 했는데, 애초에 화성을 이해 못 하는데 연주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점차 수업에도 흥미를 잃어갔다.



게다가 1학년 때는 요령이 없어 교양수업을 꼭 아침에 들어야 하는 줄 알아서 9시 수업을 선택하곤 했었는데,

이때의 나는 밤에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에 푹 빠져서 아침에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고 자연스

9시 수업을 빠뜨리곤 했다.



그러다가 점차 화성학 수업 역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수업을 1분이라도 늦으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돌이켜보면 당시 빠른 년생이기도 했던 나는 확실히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미성년자였다.



학교를 안 나가기 시작한 초반에는 친구들에게 왜 안 오냐고 연락을 받았지만, 결석이 잦아지자 친구들에게 연락도 오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혹시나 소외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화성학은 결국 최하 점수, D-를 받았다.




당연히 실기 시험 결과도 처참했다.

다른 아이들은 실기 시험 끝나고 등수가 궁금하여 과사에 전화해서 물어보곤 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생활은 2학년 때까지 비슷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언제 한 번은 아빠의 영어 과외 선생님이 집에 방문했을 때 나에게 연주하는 것을 보여달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제대로 칠 줄 아는 작품은... 없었다.

그게 스스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피아노 전공인데 제대로 자신 있게 칠 줄 아는 피아노 곡이 없다고?(물론 클래식 작품에 한해서지만 클래식 전공이니 변명의 여지없이 작품을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못하는 애'라는 생각이 잠식하며

자신감은 완전히 구렁텅이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The Dark Mountain no.1(1909) by M. Hart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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