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으로 확인한 자리
- 몸으로 확인한 자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아니었다.
잠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겼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주부모델에 도전해 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사진 찍는 걸 싫어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분야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괜히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부모델. 준비 과정부터 쉽지는 않았다.
프로필 사진을 찍으며 여러 콘셉트를 시도했고,
그 사진들을 정리해 프로덕션에 이메일로 보냈다.
생각보다 연락은 빨랐다.
신인을 찾는 곳이 많았고 몇 군데에서 오디션 제안도 받았다.
지도 앱을 켜고 처음 가보는 동네로 향했다.
겁이 없었다기보다
이 자리가 얼마나 낯선 세계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오디션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카메라 테스트, 개인기, 즉석 연기.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는 모델이 아니라 연기자처럼 평가받고 있구나.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만큼은
얼굴이 그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자리였겠지만,
나에게는 꽤 큰 용기가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게 좋은 에이전시를 만나
라이브 홈쇼핑 방송에 몇 차례 출연하게 되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긴장됐다.
내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누군가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방송이 끝나고 나면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특히 현장에서의 대기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길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선배 모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왔는지,
몸 관리와 표정 연습, 현장에서의 태도와 말투까지
하나하나가 노력의 결과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 나름의 자부심과 애씀을 들으며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의 도전이
어쩌면 너무 가벼웠던 건 아닐까 싶어서.
몸으로 한 번 겪고 나니 미련은 남지 않았다.
깨끗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방송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화면 뒤의 긴장과
보이지 않는 준비를 이제는 안다.
무모했지만
그만큼 솔직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전 하나쯤은
인생에 남아 있어도 괜찮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가볍게 시작한 도전은 몸으로 끝났고,
나는 다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싶어졌다.
다음 이야기는
전문가로 서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시간,
대학원 입학과
지역사회 상담 서포터즈 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포기는
실패가 아니라
확인 후의 선택이었다.
• 가볍게 보이는 일일수록 몸의 몫은 더 크다.
•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도전은 직접 해봐야 판단할 수 있다.
• 어떤 포기는 물러섬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는 과정이다.
그 도전은 나를 흔들었지만, 결국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