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다.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밝지도 그렇다고 깜깜하지도 않은 이런 분위기가 좋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아침을 짓는 것 같다. '언제 일어나셨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마루에서 신발을 신고 세수를 하러 갔다. 양치질도 하지 않고 세수만 하면 학교 갈 준비는 끝난다.
"아침밥 먹어야지."
"네"
흰밥에 김치, 깍두기, 된장국 그리고 숭늉이 있었다. 이 정도면 맛있다. 밥을 가득히 먹고 나니 할머니가 구들장 장판 속에서 천원짜리 3장을 꺼내셨다.
"이 돈 가지고 차비 해라. 학교 끝나면 집에 가보고 어멈이 돌아왔을꺼다.. 만약 안 왔으면 내가 다시 내려갈께...."
할머니의 당부를 듣고 면에 있는 중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 타는 곳으로 갔다. 허름한 가게 앞에 있는, 정류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에 중학생, 고등학생 등 아이들이 있었다. 다들 나를 낯설게 보는것 같았다. '신경 쓰지말자.' 조용히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반 아이들이 없기만을 원했지만 있었다. 다들 날 한번씩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애기 하는 것 같았다. 애써 나에게 와 물어봐 주지 않아서 좋았다. 이윽고 버스가 왔다. 나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지 않을 중간 문 뒤쪽 2번줄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창문을 보고 있었다.
버스는 한번에 '면'에 가지 않는다. 여러 '리'를 돌아서 내려갔다. 3번째 '리'에서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탈 때 작게 감고 있던 나의 눈이 커졌다. '지수였다.' 지수가 버스에 탄 것이었다. 어제 처음으로 알게된 그녀는 3번째 '리'에 산다는 걸 알았다. 너무 좋았다. 아침부터 지수를 봐서 하루가 행복할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는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야 했다. 같이 있던 여자애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웃었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고 즐거울까?'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주의깊게 봤다. 사람들은 조용히 있지 않고 이야기 하고, 웃는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나도 유치원때도 초등학교때도 있었는데....'왜 이럴까?' 잘 모르겠다. 세상은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중학생이 커봤자 중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남자 어른들은 날보면 한대씩 쥐어받고는 했다. 그게 우호적이지 않은건 알 수 있었다. 많이 아팠다. 남자 선생들이 몇대 쥐어받고 했다면 여 선생들은 나에게 날카로웠다. '싫어'하는 눈빛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난 사람이 싫었고 항상 주눅이 들었고 겁을 내고 있었다.
나와는 다른 '지수'를 보는게 좋았다. 달콤한 꿈에 취한 듯, 지수를 보고 있으면 이 시간이 오래 지속되길 바랬다. 터미널에 도착했고 아이들 무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향했다. 나는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그러면서 지수를 볼 수 있는 뒤쪽에서 혼자 걸어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리고 왔을까?' 하는 고민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수를 가릴 때 안보여 그게 힘들었다.
학교에 도착하고, 수업이 시작하기 전 아이들과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는 그 시간이 가장 힘들다. 누군가가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괜히 트집을 잡거나 한대 맞을까봐 겁이 났다. '어, 이상한 날이다. 한대 맞고 시작하는게 편한데 오늘은 석호와 아이들이 그냥 있네' '왜 그러지?' 하면서도 좋았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수업은 4시간만 있었다. '아 수업이 일찍 끝나도. 집에 어머니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구나....' 다시 우울해졌다. 또 지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지수는 내 옆옆줄 2칸 위에 앉았다. 내 자리에서 오른쪽 45도 돌리면 볼 수 있다. 아주 살짝 고개를 돌려 보면 된다. 우리 학교는 전부다 교복을 입어 똑같은 차림이다. 물론 멋을 낸다고 멋을 내는 아이들도 있지만 거기서거기다. 한데 지수는 똑같은 색이 아닌것 같았다. '여자 교복은 녹색이었구나. 잘 어울린다.' 무채색의 세상에 녹색이 추가되는 날이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청소 시간이었다. 내 구역 외부 청소를 마치고 들어온 교실에서 분단 청소를 하고 있었다. 석호가 해야 하는 청소인데 석호는 언제나 청소를 하지않고, 나에게 시켜서 내가 하고 있었다.
"야, 오늘 학교 끝나고, 지수랑 놀러가기로 했다."
"오 정말? 지수하고 사귀는 거야?"
"야 석호! 좋다고 그렇게 따라 다니더만 드뎌 성공했네!"
"지랄 지수가 날 좋아하는거지 병신아!"
석호와 범수 그리고 다른 애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필 내가 들어버렸다. 그녀석들이 뭐라 애기하든 말든 나는 전혀 들리지도 않았는데 '지수'이야기가 나오자 꼼짝없이 들을 수 밖에 없었다.
" 오늘 어떠냐? 나 좀 멋있어 보이냐? 크크"
석호의 말에 다른 친구들도 '오 멋져, 멋져....'하며 응수 해줬다. 갑자기 세상이 깜깜해진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소리도 안들렸다.
"어?"
생각지 못했던 충격으로 앞으로 넘어질뻔했다.
"이 새끼가 부르는데도 말 씹고 있어!"
석호가 뒤에서 발로 찼던 거였다.
"야 뚱땡아 빨리빨리 청소 안해. 담탱이 오기전에 끝내라고"
돌아서는 석호에게
"너가 해...."
"응? 잠깐 이 새끼가 지금 뭐라 한 것 같은데...."
석호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섰다. 처음으로 석호의 얼굴을 본것 같았다. 나보다 작아서 시선이 잘 마주치지 않는다.
"야 돼지새끼야 너 지금 뭐라했어? 미쳤냐?"
"여기 청소는 너잖아. 너가 해"
"퍽퍽!" 석호의 주먹이랑 발차기가 날라왔다. 아프지 않았다.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날라오는 주먹에 나도 모르게 팔을 들었다. 석호의 주먹이 내 팔꿈치에 맞은 것 같았다.
"악~이 새끼가"
석호는 오른손을 다쳤는지 더 이상 날 칠수가 없었다. 아니 내 표정을 봐서 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표정은 악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어..."
주변에 있던 범수도 아이들도 그 순간 날 피했다. 청소로 시끄럽던 교실은 조용해 졌다. 나는 말없이 떨어진 빗자루를 청소함에 넣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조용하게 분명 나 혼자만 있었다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잠깐의 배회 끝에 담임 종례가 있을거라 교실로 들어갔다.
담임이 들어오고, 담임의 훈시가 있고, 지수의 얼굴을 잠시 보고, 나는 조용히 가방을 어깨에 맸다. 누구에게도 인사를 할 필요없는 상황이 오늘은 좋았다.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 사이를 벗어나, 나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모를 기분이었다. 나는 지수를 안게 어제 였고, 지수랑 나는 이야기도 해 본적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무엇때문에, 뭐냐고, 이 기분은.... 왜 왜 왜....거지같냐고....' 애써 지수를 안 떠올릴려고 노력했다. 지수가 생각나면 석호도 생각나고 그리고 불쾌한 무언가가 자꾸 나를 좀 먹기 시작했다.
'아무일도 없었어. 그래 아무일도 없었다.' 나는 작은 눈을 더 작게 감은 채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집이 보였고, 바닥에 신발을 벗고, 안방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오늘 못 데리고 오나보다.' 안방에 누웠다.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누웠다. 잠을 자면.... 잠을 자고 나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집에 있을거고, 지수는....모르겠다. 나는 아픔도 모르고, 힘듬도 모른다. 어제와 오늘 '아무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