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일도 없었다의 소설판입니다.
"어서 일어나."
자다 어머니의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빨리 수돗가 가서 세수하고 와, 밥 먹고 학교 가야 하니까"
"네"
수돗가에 갔다. 수도꼭지를 켜고 세숫대야에 물을 받았다. 찬물만이 있을 뿐이다. 아까 나오기 전 벽에 걸려있던 사각 거울을 봤을 때가 기억났다. 분명 머리가 붕 떠 있었다. '오늘 세수하면 머리 쪽도 하리라.'
'윽 차가~'
차가운 물에 손을 넣고 얼굴을, 눈을 세게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찬물을 끼얹어 얼굴 전체를 하고, 앞머리와 옆머리를 젖게 했다. 찬물에 도저히 머리 감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 더 물을 끼얹고 있었는데... 얼굴 옆에 아주 조그마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뭐지?'
'이'였다.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머리에 이가 엄청나게 사나보네...나중에 엄마에게 잡아 달라고 해야겠다. 아유 머리 간지러'
아무 일 없듯이 세수를 마치고 세 들어 사는 셋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5인 가족이 사는 셋방은 방이 2개다. 입구 자그마한 문을 열면 신발을 벗는 바닥 공간이 있고 폭이 좁은 마루가 있다. 마루에서 안방 문을 열면 우리 5식구가 다 자는 큰 방이 있다. 큰 방에서 가운데 조그마한 문을 열면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이 있었다. 보통 큰방에서 조금 큰 상으로 온가족이 식사를 한다. 아침에 동생들보다 더 일찍 학교를 가야 하는 나의 경우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조그마한 소반에 밥과 계란후라이 하나만을 주고 먹게 했다.
"엄마 계란 더 없어요? 하나는 너무 적은데"
"동생들도 먹어야지 빨리 학교나 가~"
학교 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갑자기 배고픔 기분도 없어졌다. 학교에 가면 거의 자주, 종종 석호랑 그 주변 애들이 시비를 걸고 동네북마냥 때리고 괴롭혔다. 그리고 그걸 여자애 중 경숙이랑 은애가 '깔깔' 거리며 내가 괴로워하는걸 좋아했다.
가기는 싫지만 학교는 가야 한다. 애들이 괴롭힌다고 학교를 안 가는 건 이유가 못 된다. 초등학교만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어머니에게 나는 제법 공부를 잘하는 아들인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로 갔다. 제법 넓은 길에 사람들이 오고 갔다. 거리에는 자동차도 오고 가고, 즐비하게 서 있는 옷 가게, 식당, 문구점 등은 보는 즐거움을 줬다. 학교로 걷는 그 길이 하염없이 길었으면 했다. 어린 중학생에게 30분 이상 되는 거리인데 '더 멀어라. 멀어라.' 했던 그 거리에 학교 정문이 보였다. 많은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삼삼오오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무채색이 되었다. 눈에 초점은 없어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기계적으로 현관을 통과하고, 신발을 신발주머니에 넣고 실내화를 꺼내고, 계단을 오르고 2학년 2반으로 들어갔다.
'퍽'소리와 함께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누가 뒤통수를 쳤다.
"어야 뚱땡이 왔냐?"
"오우야 얼마나 쳐먹었음 돼지 새끼가 어제보다 더 뚱뚱해 보이냐!"
뒤통수를 친 건 석호였다. 그 옆에 범수가 같이 '낄낄' 웃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고개 숙이고 조용히 내 자리로 갔다. 경숙이랑 은애가 안 와서 다행이었다. 그랬으면 교실이 떠나가라 웃고 있었겠지. 석호랑 범수도 싫지만 경숙이랑 은애도 싫었다. 애들은 나에게 뭐라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경멸하듯 쳐다보는 그 눈빛과 일부러 더 크게 웃는 소리가 처연하게 싫었다.
덩치가 좋은 나는 수업 시간 아이들의 든든한 방패였다. 정해진 자리가 아닌 항상 내 뒤로 와 수업 시간에 자거나, 아니면 샤프로, 연필로 내 등을 꾹꾹 찌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묵묵히 견디고 또 견뎠다. 반응이 없음, 몇 번을 시도하다 그만두고 했으니까...
오후 끝 수업은 과학실에서의 수업이었다. 이론 수업은 그럭저럭 자신 있는데, 반 친구들과 조를 편성해서 하는 실기 수업은 특히 싫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건 어렵지가 않은데, 몸으로 뭔가를 행하는 건 나에게 엄청난 젬병인것이다.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몰려가는 아이들과 달리 적당히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으면서 존재감 없이 걸어갔다. 모든 수업이 싫지만 이렇게 특별실에서 6~7명이 서로 마주 보며서 하는 수업 방식은 너무나 싫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만의 상상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심리적 거리는 멀지만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아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참 다행이었다. 오늘은 이론 수업이었다. 자리 등은 조 편성으로 앉았지만, 실기 실습이 없었다. 거기에 내 앞에서 마주 않아 보아야 할 한 명도 오늘은 없었다. 과학 수업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중간고사 전에 잠깐 공부하면 100점은 받을 수 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반대쪽 벽을 보며 공상하면 되는 거다. 벽의 무늬를 보다 보면 매직아이처럼 이미지들이 튀어나온다. 나는 맘속 연필로 그 이미지들을 연결해 근사한 그림을 그린다. 산을 그리고, 하천을 그리고, 상상 속 동물을 그리는 등 나의 정신은 온통 다른 세계로 가있다.
'어...?' 어떤 느낌을 느꼈다. 무언가가 나를 보는듯한 느낌을.... 내가 보던 이미지는 사라지고, 오른쪽에 다른 조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하얗다. 저렇게도 얼굴이 하얄 수가 있구나...' 시골에서 나고 자란 갈색 얼굴의 나에게 하얀 얼굴의 여자아이는 처음 본 광경이었다. 아니 2학년 올라와서 분명 몇 번이고 마주쳤을 아이인데.... 오늘 보였다.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 들었을 텐데...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니까.... '어? 지금 나를 보는건가?' 계속되는 시선에 나도모르게 나의 앞과 뒤를 보게 되었다. '없는데.... 어떤것도 없는데.... 설마 날 보는건가?' 급기야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곳까지 사고가 확장되었다. '이건 꿈이야...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지니 갑자기 편안해졌다.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나는 이날 처음으로 회색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얀 색깔을 쳐다봤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던지 밑으로 시선을 내리까는 것 없이 오롯이 상대방을 봤다. 흙단 같은 포니테일, 가운데 가르마였다. 얼굴은 하얗고 눈이 굉장히 컸다. 그리고 제일 신기했던 게 볼살이 없고, 턱이 갸름해 선명하게 목과 얼굴이 나눠진 게 보였다.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 친구는 영락없는 여주인공이었다.
'아름답구나' 처음으로 여자를 인식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여자와 남자는 다 똑같았다. 괴롭히거나, 무시하거나 아무 생각 없는 것. 불빛에 매료되어 자기 몸이 타는 것도 모르는 '나방'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봤다. 여자아이가 살핏 웃고 있었다. 상상일지도 모른다. 가여운 내가 나에게 주는 아름다운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랬다. 한데 아쉽게도 그 시간은 끝났다.
보통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갈 때는 발걸음도 신났다. 한데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내 안에 무언가가 생긴 기분이었다. 낯선 감정은 회색 세상의 나에게 자꾸 색깔을 줬다. '지수' 몰래 알아낸 우리 반 그 여자 아이 이름이었다. '지수.... 지수.... 지수' 누가 들을까봐 몰래몰래 속으로 몇 번이나 이름을 되뇌어 봤다.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함이 나의 온몸을 덮고 심장 부분에서는 조그마한 아름다운 보석이 자라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안 보이고, 할머니가 있었다. '왜 할머니가 계시는 거지?' 할머니 말씀으로 '어미가 동생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나에게 자주 있는 일이라.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늘 어머니가 친정으로 도망간거다. 어제 아버지가 밤늦게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온 거다. 아버지가 늦게 오는 날은 두렵다. 늦는다는 것은 술을 마시는 거고, 술을 마시고 오면 어머니와 그리고 나와 동생들을 때렸다. 이유는 없었다. 없었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어머니에게 시작된 폭력은 어머니가 도망가면 나에게로 오기 때문이다.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고함을 치고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말싸움이 있었고, "철썩"하는 뺨을 맞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어머니가 흐느껴 울다, 어딘가로 도망갔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나는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를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어차피 방이야 하나뿐인데.... 아버지가 자는 나를 건드렸다. 내가 일어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 나를 깨우기 위해 크게 흔들던 손길이 '철썩! 철썩!'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않겠다.' 아버지의 알 수 없는 술에 취한 소리와 빰을 때리는 소리만이 집에 있었다. '일어나지 않겠다.' 결국 두 손을 든 것 같았다. 나는 깊은 수마로 빠져들 수 있었다. '내일은 어머니가 날 깨워주고, 아침밥을 해주고, 평상시랑 똑같았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못 참았는가 보다. 동생 둘을 데리고 간 것 같다. 조금만 더 있음 나도 학교에서 돌아왔을 텐데.... '나의 공부는 중요하다.' 하시는 분이니 나는 일부러 빼고 간 것 같다. '학교에서 나의 모습을 봤다면 내가 얼마나 학교에 적응 못 하는지 알텐데..., 아니 내가 어머니께 말하면 되는데 그녀의 유일한 희망의 끈을 없애는것 같아 용기가 안 났다.'
의도치 않게 할머니와 1시간 거리의 할머니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할머니께 나를 부탁하고 본인은 어머니께 가려고 한 것 같다. 터미널에서 할머니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버스 시간은 2시간에 1대이고, 한번 놓치면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거였다. 학생 몇 명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분명 내가 아는 우리 반 아이들인 듯도 했다.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그네들을 피하고 싶었다. '제발, 제발 날 모른 척해줘' 그네들과 나의 맘이 일치한 듯했다. 고마웠다. 버스가 왔다. 할머니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지금은 타면서 버스요금을 내는데, 이때는 버스 안내양이 버스비를 받았다. 보통 여성이 대부분인데, 남자가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어느 정도 간 후에 남자가 버스비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 차례가 왔을 때, 할머니 본인은 납부하시고, 내 것을 납부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돈이 없었던 거다. 그때부터 남자는 "할머니 빨리 버스비 내세요. 버스비요.... 버스비 내라고~~~"처음에 존댓말이었던 말이 나중에는 거의 협박처럼 되었다. 할머니는 "돈 없어"라고 항변할 뿐이었다. 항변보다는 그냥 체념인 것도 같았다. '할머니도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1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거리가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다. '나 때문에...할머니도 고생하는구나...' 죄책감만 계속 들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스 안내 남자가 나와 할머니를 쳐다봤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둘러 할머니 집으로 갔다.
"배고프지?"
"네 배고파요. 할머니"
"그래 잠깐 이 감자라도 먹고 있어라. 할미가 바로 밥해줄게"
할머니는 소쿠리에 찐 감자 몇 알을 나에게 주고, 쌀을 씻으러 수돗가로 갔다. 할머니 집에서는 정말 할 것이 없다. 마루에 그냥 앉아서 찐 감자를 먹었다. 맛있다는 생각도 없고, 그냥 할 것이 없어서 먹었다. 마당을 보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다는 생각뿐이었다. 할머니가 해 준 밥을 다 먹고 전구 다마에 불을 켰을 때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밥을 하는 것도 할머니고, 치우는 것도 할머니고, 설거지도 할머니가 다 했으니까....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불현듯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잔불이 보고 싶었다. 아궁이 속 불은 슬금슬금 먹을 것이 없어지니, 자기 소임을 다한 듯 꺼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싫어서 아궁이 주변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를 집어넣었다. 먹을 것을 받은 아궁이 속 불은 다시 활활 타오르고, 다시 없어지고, 다시 넣으면 타오르고 꺼지고를 반복했다. 계속하고 싶었는데...불이 다 꺼지면 마치 나도 꺼질 것 같은 기분으로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무리 반복한다 해도 결론은 정해졌다. 나는 마지막 불이 사그라드는걸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의 할머니는 조용하신 분이었다.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부자리를 깔아줬다. 나는 이부자리에 들어갔다. 전구 다마에 불이 꺼지고, "컹컹" 먼 곳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조용히 잠을 청했다.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분명 9시 전일 거로 생각했다. 9시만되면 쓰러지듯 잠을 자던 나였기에 잠이 안오는것은 9시 이전이다. 아무 생각 없던 나인데 잠이 안 오는 그날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학교, 석호, 범수, 은애, 경숙'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내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지고,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생존'이라는 살아있는 것들에 당연히 있는 최우선 숙제마저도 없어지려는 기분이었다.
그때 '과학실'이 오늘 오후에 있었던 '딱 하나 남은 기억'이 머릿속에 들었다. '지수.... 지수.... 지수'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봤다. 현실 같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생각했다. '무엇을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다. 그냥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고, 계속 그녀만 쳐다보고 싶을 뿐이다. 한 방울 눈물이 그림처럼 흘렀다. 그러다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쩌면 어제부터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젯밤은 평상시의 밤보다 더 무서웠다. 오늘 오전에 괴롭힘이 없기만을 바랬다. 오후에는 집에서 동생들과 저녁 먹고 ,아무 일 없듯이 어머니와 술을 마시지 않는 아버지와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떠났고, 돈 한푼이 없어 버스 안에서 죄책감을 느꼈고, 할머니께 죄송스러웠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그런 것은 없다. '내가 있어서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어머니는 아버지께 맞고, 할머니는 나 때문에 그런 안 좋은 경험을 했어야 한것이 아닐까...'
불편하고 불편한 생각들이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지수~"아주, 조용히, 나직이, 입 밖으로 벗어난 단어 하나로 인해 사고가 바뀌었다. 나는 오늘 오후의 과학실로 하얀 세상으로 갈 수 있었다. '내일 잘될 거다. 내일 어머니가 동생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실 거다, 내일 학교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다. 내일 ...뭔가 잘될 거다.' 처음으로 희망을 느꼈다. 그리고 잤다. '내일! 내 생각대로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