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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Mar 13. 2024

21편. 그림, 현실이 되다.

[21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어제는 파리떼가, 오늘은 난데없는 총소리다. 엇! 이거 비상상황 아니야? 어딘가 대피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속세와 거리가 있는 순례객은 마냥 애가 탄다. 게다가 몇 주 전 기사에 남프랑스의 한 마트에 강도가 침입해 총을 겨눠 1명이 희생됐다는 무시무시한 뉴스가 떠올라 시나리오는 걷잡을 수 없이 스릴러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 셋 다 상황파악이 안 되어 어리둥절한 채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 풀숲에 무장한 잠복 군인이 보였다. ‘설마 진짜 도망간 그 강도를 붙잡으러?’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갑자기 스치는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기억의 필름이 시간을 10분 전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어떡하지? 조안나, 마리엘라 나 우리 모두 자연의 부르심에 풀숲 화장실로 달려갔었는데. 설마... 덤불 속에..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을 거야. 아무도 없었을 거야.’

초긍정 마인드로 무장한 채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엎드려 포복해 있는 군인들을 유유히 지나쳤다.      

잠시 뒤 군인들을 잔뜩 태운 탱크 한 대가 지나간다. 곳곳에 철조망도 보이고 군부대도 지나간다. 덤불 속 군인들은 훈련을 수행하고 있었던 거다. Castres라는 지명이 '요새화된 장소'라는 의미의 라틴어 Castrum에서 유래된 것을 생각하니 조금 전 풍경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숲길을 빠져나오면서 상상의 나래도 접혔고, 우린 점차 도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   

   

Castres(카스트르)는 Montpellier(몽펠리에)와 Toulouse(뚤루즈) 사이에 있는 마을 중 가장 큰 도시다. 산길과 숲길, 논밭과 가축만 보던 순박한 시골 주민이 간만에 대도시를 구경 나온 기분이다. 오늘만큼은 순례객이 아닌 관광객 모드다.

Agout강을 끼고 늘어선 알록달록한 집들의 호젓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 컷 찍어 본다.     

어반 스케치 by 김명숙 (조안나와 마리엘라 in Castres)

최대 스페인 회화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Goya박물관도 관람하고 엘 그레코의 그림도 감상하며 오랜만에 자연인에서 교양 있는 문명인의 모습으로 거듭나본다. 시간을 거슬러 옛 로마 양식의 St. Benoit 성당에 담긴 역사의 긴 시간도 느껴본다.


그나저나 하루 새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마터면 저녁 한 끼도 못 먹을 뻔한 어제와 달리 오늘은 대형 마트에서 너무 많아 뭘 골라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 중이다. 숙소도 순례객 숙소 지트가 아니라 도심 한 복판 에어 비앤비다.

요즘 조안나의 숙소 픽이 신선하다. 오늘의 숙소는 아이와 두 부부가 사는 가정집에 딸린 방 하나다. 화장실을 이용하러 거실에 나오니 주인장 내외의 방에서 TV 소리며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한 가족의 일상으로 데워진 따뜻함과 안정감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순간 매일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 나그네, 순례객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더 또렷이 다가왔다.     

다음 날 아침 머물고 싶은 ‘집’이라는 공간을 떠나 Dourgne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자연이다. 길에서 만나는 토끼, 당나귀, 소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늘은 밀밭을 지나간다. 곳곳에 양귀비꽃도 보이기 시작한다. 도심에서 준비한 든든한 햄버거 점심이 불러온 증상이었을까 아니면 나른함을 유발하는 양귀비꽃에 의한 반응이었을까. 조안나와 마리엘라, 쉴 때마다 잘 눕는 건 알았지만 오늘은 한 술 더 떴다.


둘은 잠시 밀밭에 누워 한숨 자고 가잔다.


둘은 배낭을 베개 삼아 먼저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허허. 난 이들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밀밭 위 우리 셋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뒤 나도 잠시 단잠에 빠졌다.   

한 30분쯤 잘 자고 일어나 도착한 숙소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이었다. 요즘 숙소 담당 조안나의 숙소 픽은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 듯 종잡을 수 없다. 어제는 도심 한 복판 가정집이라는 세속적인 공간으로 안내하더니 오늘은 침대와 작은 책상 그리고 십자가 하나 단출하게 걸려 있는 군더더기 없는 수도자의 방이다.


짐을 풀고 찬찬히 수도원 이곳저곳을 안내받아 둘러보다 우린 수도원 내 성물방 구경을 하러 들어갔다. 학창 시절부터 편지 쓰는 걸 좋아해서일까? 새로운 곳에 가면 난 엽서를 꼭 하나씩 산다. 오늘도 어김없이 엽서 코너를 서성이고 있는데 눈앞에 나타난 한 엽서가 나의 동공을 한껏 확장시키고 있었다.


밀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세 명의 순례객이 그려진 엽서. 바로 조금 전 우리의 모습이었다.


우리 셋은 깔깔깔 신기해하며 이 믿기 힘든 우연을 기념하기 위해 각자 하나씩 엽서를 샀다.   

그 순간 자물쇠의 마지막 비밀번호가 맞춰지며

비밀의 문이 철컥 열리는 것 같았다. 그 문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빛의 스펙트럼은 그간의 일들을 일순간에 주마등처럼 보여 주었다.


한 남학생으로 인해 불어닥친 혼돈 속에

성당에서 바치던 기도.

미술관에서 고흐의 ‘정오의 낮잠’을 보며

흘리던 치유의 눈물.

그래서 아를에서 순례를 시작한 나.

힘들만하면 누워 쉬던

두 이탈리아 친구들과의 우연한 만남.

오늘 밀밭에서의 낮잠.

그리고 도착한 숙소에서 기다리던 우리 셋을 닮은 엽서. 마지막으로 이 퍼즐이 완성된 수도원 성당.      


그림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다시 그림이 된 순간.


 한국의 한 성당에서 올린 간절한 외침에

“떠나라.”던 이끄심.


그리고 떠나온 응답에 보여주신

남프랑스 수녀원 성당에서의 놀라운 순간.


시작과 끝이 맞닿은 이 순간.   

고흐의 낮잠-밀밭 위 우리의 낮잠-수도원 성물방 엽서

누가 억지로 짠다고 한들 이보다 더 정교할 수 있을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정교하게 짜인 지난 시간 앞에 난 신께 뜨겁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빅 픽쳐. 제 좁은 식견으로는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이것이 당신의 큰 그림이셨군요.
그래서 떠나라고 하셨군요.
제 삶을 이토록 근사한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 주시려고. 고맙습니다.
사막 위를 걷고 있던 제게 길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멋진 삶을 선물해 주셔서.”


Day 16: Boissezon Castres  18km (27/04/2018)

Day 17: Castres Dourgne 22.5km (28/04/2018)


**빅 픽쳐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저의 글

4,5편을 읽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4편. 이런 위로는 처음이야. (brunch.co.kr)

5편. 세 번 만에 알아차린 하트시그널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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