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일핑크 Sep 18. 2023

맛없는 커피도 매일 마시면 중독된다.

모닝 루틴에 대하여



최근 1년의 아침에는 루틴이 생겼다. 회사에 도착하면 빠르게 출근 체크를 한 후 탕비실로 가서 텀블러에 에스프레소를 담고 얼음을 가득 채운다.


차가운 생수를 알맞게 부으면 만들어지는 아메리카노. 텀블러의 2/3 정도 물을 채웠을 때 마시기 알맞은 비율이 된다.


전투태세에 몰입할 준비물을 챙겼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동안 집중할 수 있겠구나. 커피를 받아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다.





처음 이 커피를 마셨을 때 어쩌면 이렇게도 맛이 없을 수가 있는가 놀라며 두어 모금 정도 마시고 모두 버린 기억이 있다. 13개월 휴직 후 복직한 회사 커피맛은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원두의 문제인가, 기계의 문제인가? 커피 원두에서는 단맛, 쓴맛, 신맛, 과일맛, 초콜릿맛 등 최소 5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냥 쓴맛이 주를 이루고 담뱃재 같은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동료들은 커피 머신에 와서 연신 커피를 내려 마셨다.


"탕비실 원두커피 괜찮아요?"


나는 종종 팀원들에게 묻곤 했다. 최악이라는 평보다는 그냥 먹을만해요.처럼 큰 불평 없이 마시고 있었다. 어떤 팀원은 절대 먹지 않는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다.라는 말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탕비실 커피를 즐겼다. 아침에는 쉴 새 없이 원두 가는 소리가 들렸다. 탕비실에 들르는 사람의 반 이상은 기계에서 원두를 내려 마시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몇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밖으로 나가서 사 먹어야 한다는 것, 추가 지출을 면할 수 없다는 것, 봉지 커피만을 마셔야 한다는 것 등 불편한 상황들이 따라온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의 내가 입맛이 이상했기를 기대하면서.


머신의 아메리카노 모드를 이용하기보다는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물을 별도로 채워서 먹는 편을 선택했다. 에스프레소는 배신하지 않겠지.  


몇 번의 실패 후에  어느 날 내게 맞는 최적의 비율을 찾았다. 얼음을 넣든, 따뜻하게 내려 마시든 먹을 만한 커피의 맛. 아주 맛있다고 하기엔 뭐 하지만 다음에도 마실 수 있겠는 것. 나는 그 이후로 매일 아침 탕비실의 커피를 찾게 되었다.


여전히 퀄리티가 높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마실만한 커피가 주는 편안함은 일상의 여러 불편한 점들을 해소해 주었다.


굳이 밖에 나가서 사 먹지 않아도 되는 것,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

추가 지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기분에 따라 언제든 마실 수 있다는 것.


음료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부으면 라테, 아몬드 브리즈를 넣으면 아몬드 라테, 두유를 넣으면 두유 라테. 간단한 조제 커피들은 손쉽게 해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하루 한잔은 마시고 있으니 맛에 대한 예민한 반응보다는 오늘은 무엇을 마실지 고민한다.


출근 직 후 커피를 내리는 이 모닝 루틴이 커피의 맛보다 더 중독적이라는 걸 시간이 갈수록 느끼고 있다.


나는 이 커피를 받아 들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집중의 시간을 늘릴 수 있겠다고 의지 해본다. 이해와 판단, 제시, 방향성 이런 것들에 대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어 본다. 그렇게 내가 다른 길로 새어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커피가 있다는 이유로 집중할 수 있다고 되뇌어 본다. 매일 마시는 이 커피 루틴에 중독이 되어 버리니 맛없던 커피도 점점 맛있게 느껴진다.

며칠 전 팀원들에게,
"탕비실 원두 머신 진짜 맛이 없었는데 자꾸 마시다 보니 괜찮아요."라고 했더니,
"저도 그래요. 처음엔 별로였는데 계속 마시니 지금은 괜찮던데요. 그래도 사내 카페가 좀 더 낫지만요." 하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정말로 원두가 바뀌어서 맛이 나아진 것인지, 우리의 입맛이 변한 건지 알 수 없다. 맛없는 커피에 중독이 되어버려 판단이 흐려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커피가 주는 경험이 다시 커피를 찾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게 어떤 커피이든 간에.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셔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