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의 아침에는 루틴이 생겼다. 회사에 도착하면 빠르게 출근 체크를 한 후 탕비실로 가서 텀블러에 에스프레소를 담고 얼음을 가득 채운다.
차가운 생수를 알맞게 부으면 만들어지는 아메리카노. 텀블러의 2/3 정도 물을 채웠을 때 마시기 알맞은 비율이 된다.
전투태세에 몰입할 준비물을 챙겼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동안 집중할 수 있겠구나. 커피를 받아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다.
처음 이 커피를 마셨을 때 어쩌면 이렇게도 맛이 없을 수가 있는가 놀라며 두어 모금 정도 마시고 모두 버린 기억이 있다. 13개월 휴직 후 복직한 회사 커피맛은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원두의 문제인가, 기계의 문제인가? 커피 원두에서는 단맛, 쓴맛, 신맛, 과일맛, 초콜릿맛 등 최소 5가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냥 쓴맛이 주를 이루고 담뱃재 같은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동료들은 커피 머신에 와서 연신 커피를 내려 마셨다.
"탕비실 원두커피 괜찮아요?"
나는 종종 팀원들에게 묻곤 했다. 최악이라는 평보다는 그냥 먹을만해요.처럼 큰 불평 없이 마시고 있었다. 어떤 팀원은 절대 먹지 않는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다.라는 말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탕비실 커피를 즐겼다. 아침에는 쉴 새 없이 원두 가는 소리가 들렸다. 탕비실에 들르는 사람의 반 이상은 기계에서 원두를 내려 마시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몇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밖으로 나가서 사 먹어야 한다는 것, 추가 지출을 면할 수 없다는 것, 봉지 커피만을 마셔야 한다는 것 등 불편한 상황들이 따라온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의 내가 입맛이 이상했기를 기대하면서.
머신의 아메리카노 모드를 이용하기보다는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물을 별도로 채워서 먹는 편을 선택했다. 에스프레소는 배신하지 않겠지.
몇 번의 실패 후에 어느 날 내게 맞는 최적의 비율을 찾았다. 얼음을 넣든, 따뜻하게 내려 마시든 먹을 만한 커피의 맛. 아주 맛있다고 하기엔 뭐 하지만 다음에도 마실 수 있겠는 것. 나는 그 이후로 매일 아침 탕비실의 커피를 찾게 되었다.
여전히 퀄리티가 높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마실만한 커피가 주는 편안함은 일상의 여러 불편한 점들을 해소해 주었다.
굳이 밖에 나가서 사 먹지 않아도 되는 것,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
추가 지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기분에 따라 언제든 마실 수 있다는 것.
음료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부으면 라테, 아몬드 브리즈를 넣으면 아몬드 라테, 두유를 넣으면 두유 라테. 간단한 조제 커피들은 손쉽게 해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하루 한잔은 마시고 있으니 맛에 대한 예민한 반응보다는 오늘은 무엇을 마실지 고민한다.
출근 직 후 커피를 내리는 이 모닝 루틴이 커피의 맛보다 더 중독적이라는 걸 시간이 갈수록 느끼고 있다.
나는 이 커피를 받아 들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집중의 시간을 늘릴 수 있겠다고 의지 해본다. 이해와 판단, 제시, 방향성 이런 것들에 대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어 본다. 그렇게 내가 다른 길로 새어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커피가 있다는 이유로 집중할 수 있다고 되뇌어 본다. 매일 마시는 이 커피 루틴에 중독이 되어 버리니 맛없던 커피도 점점 맛있게 느껴진다.
며칠 전 팀원들에게, "탕비실 원두 머신 진짜 맛이 없었는데 자꾸 마시다 보니 괜찮아요."라고 했더니, "저도 그래요. 처음엔 별로였는데 계속 마시니 지금은 괜찮던데요. 그래도 사내 카페가 좀 더 낫지만요." 하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정말로 원두가 바뀌어서 맛이 나아진 것인지, 우리의 입맛이 변한 건지 알 수 없다. 맛없는 커피에 중독이 되어버려 판단이 흐려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커피가 주는 경험이 다시 커피를 찾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게 어떤 커피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