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햇살을 재현해낸 사람들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2004)

by Abyss

* 소제목의 글자 수 제한 때문에 영어 소제목이 잘렸습니다.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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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3RAU0T2RC4?si=_8DofYxR70ZyBtkE


겨울을 맞아 한국인이 사랑하는 겨울 영화, 사랑 영화를 거론할 때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1995)>와 함께 빠지지 않는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2004)>을 오랜만에 감상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한국의 많은 아티스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는데요, 밴드 혁오는 감독의 이름 '미셸 공드리'를 딴 <공드리>라는 곡을 발표하였고, 인디밴드 라쿠나는 영화 속에서 기억을 지워 주는 회사의 업체명으로 나오는 '라쿠나'를 그대로 밴드의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9 에서 릴보이의 경연곡에 등장한 'Meet me in montauk'이라는 가사도 <이터널 선샤인> 속 유명한 대사의 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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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개인적으로 미셸 공드리라고 하면, 낭만적이고 따뜻한 분위기의 작품들을 연출하는 듯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2013년 연출작 <무드 인디고(Mood Indigo)>의 이미지가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 같아요. 치즈가 부른 동명의 곡도 있는데, 역시 발랄하고 따뜻한 사랑을 노래하는 곡입니다.


그러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살피다 보니, 이 사람이 더욱 일관적으로 연출하고자 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따뜻하고 말랑한 낭만 뒤에 있는 어떤 불안함, 의심인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무드 인디고(2013)>도 후반부터는 암울하다 싶을 정도로 어두워집니다. 데뷔작인 <휴먼 네이처(2001)>는 문명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원초적인 서사와 이미지로 다루었고, 봉준호 감독, 레오 카락스 감독과 작업을 같이 했던 <도쿄!(2008)>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영화작가를 꿈꾸는 연인을 따라 도쿄까지 따라 온 히로코는, 무력함과 소외감 속에 서서히 의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미셸 공드리의 영화는 아주 간단하게, '?(물음표)'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과 같은 낭만 뒤에는 언제나 의심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 <이터널 선샤인>은 멜로 영화이지만 어쩐지 사랑하는 시간보다는 극단적으로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순간, 혹은 사랑에 고통받는 순간 등의 비중이 높습니다. 많은 멜로 영화에서처럼 <이터널 선샤인> 역시 사랑의 낭만성을 강조하며 우연 같은 운명과 등장인물들의 의지에 기대고 있긴 합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헤어지고 기억을 지운 뒤에도 몬탁에서 다시 만났고,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갈등을 다 알면서 다시 한번 더 시작하기로 의지를 굳히니까요. 그러나 다시 만나겠다는 그들의 다짐 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방점을 찍는 것은 역시 '그래도 괜찮을까?', '다시 같은 끝이 나지 않을까?' 와 같은 물음표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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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찰리 카우프만(Charlie Stuart Kaufman)


그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의 각본을 맡아 비평가상을 휩쓸며 본격적으로 영화 각본가로서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어댑테이션(2002)>, <휴먼 네이처(2001)>, <이터널 선샤인(2004)>의 각본가로 활동했습니다. 2007년에는 <시네도키, 뉴욕(2007)> 이라는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아노말리사(2015)>를 듀크 존슨과 공동 감독했으며,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까지여러 굵직한 작품들을 작업했습니다.


찰리 카우프만 역시 그만의 색깔이 돋보이는 창작자 중 한 명입니다. 카우프만의 영화에서는 주로 개인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에 SF적, 혹은 초현실적 상상력을 덧붙이는 방식이 자주 사용됩니다. 그 방식이 주는 몽롱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탓에 때로 난해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의 전환이 일어나고, 복잡하고 철학적인 내래이션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꼭 제정신으로 누군가의 한바탕 꿈을 구경하는 기분이 들죠. 이런 점으로 보면, 찰리 카우프만은 '말줄임표(......)'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카우프만이 구축한 세계는 뜬금없어 보이고 납득 가능한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침묵하는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장면과 대사들 사이 생략된 빈틈을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하니까요.


카우프만 역시 삶과 사랑을 조금은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듯합니다. 너무 달라서 사랑에 빠졌지만 정확히 그 이유로 헤어지게 되는 연인의 이야기가 담긴 <이터널 선샤인>을 비롯하여, 마치 내 인생을 바꾸어 줄 것처럼 나타나 사랑하게 된 사람도 거슬리는 식습관 하나로 곧장 그에 대한 사랑이 식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아노말리사>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카우프만의 이야기는 회의적이고 허무하더라도, 순간이 주는 소중함을 잃지 말자고 동시에 주장합니다. <이터널 선샤인>에 인용되는 시의 구절처럼, '영원한 햇살'은 존재하지 않고 결국 춥고 어두운 겨울은 올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짧게 내리쬐는 햇살의 따사로움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터널 선샤인>을 관통하는 카우프만적인 메세지는, 기억을 지우는 시술을 피하고 취소하기 위해 애쓰던 조엘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함께였던 때를 추억하며 뱉은 대사, "Enjoy it. -그냥 음미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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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감독 존 브리온(Jon Brion)


음악은 존 브리온이 맡았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노의 도박사(1996)>로 영화음악을 시작하여 <매그놀리아(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2017)>의 음악을 맡았습니다. 모두 탁월한 선곡으로도 유명한데, 놀랍게도 그는 칸예 웨스트의 <Late Registration>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전설적인 음악 프로듀서이기도 합니다. 해당 앨범의 작업을 통해 존 브리온은 힙합 앨범에 관현악 사운드를 도입해 서정성을 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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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감독 엘렌 쿠라스(Ellen Kuras)


마지막으로 <이터널 선샤인>의 촬영을 담당한 촬영감독인 엘런 쿠라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스파이크 리 등의 유명 감독과 협업했던 그는 여성 최초로 미국촬영감독협회(ASC)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촬영감독입니다. 또한 선댄스영화제에서 <안젤라(1995)>, <퍼스널 벨로시티(2002)>, <졸도(swoon, 1992)> 로 세 번이나 극영화 촬영상을 받기도 했는데요,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2023년 공개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전기영화 <리(Lee)>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안은 케이트 윈슬렛 측에서 먼저 보내 왔는데, 엘렌 쿠라스는 카메라 뒤에서 말하는 여성으로서 영화 <리>의 주인공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엘렌 쿠라스는 <이터널 선샤인>의 촬영 과정에서 캐릭터들의 감정적인 부분을 관객들이 잘 느낄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미셸 공드리 감독과 나누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캐릭터들이 감정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여 그것을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엘렌 쿠라스에 따르면,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내화면 안의 환상이 잘 포착된 영화입니다.







나가며


<이터널 선샤인>의 제작 비하인드는 한국에서도 알음알음 알려져 있습니다. 감독의 전 여자친구와의 일화가 영화에 반영된 것이나, 코미디 배우였던 짐 캐리가 정극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다들 놀랐던 일화 등이 있죠.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인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역시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배우이기도 합니다. 감독과 각본, 음악감독과 촬영감독과 배우들까지 각지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열정을 맞댄 <이터널 선샤인>은 과연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관객과 문화예술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독특한 작품인 듯합니다.


'너무 춥다'며 보낸 겨울들이 깨끗이 잊힌 것처럼 여전히 생생하게 추운 겨울, <이터널 선샤인>을 만든 여러 제작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이터널 선샤인>을 감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이터널 선샤인>은 넷플릭스에서 2025년 1월 31일까지, 쿠팡플레이, 웨이브, 왓챠에서 종료 기한 없이 감상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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