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피 Sep 20. 2023

하이킹

트리운트 산행을 예약했다.

보통은 6시간 코스인 트리운트 트래킹을 많이 하지만 나는 그 너머 봉우리로 조금 더 가 볼 계획이다. 산에서 며칠 노숙을 해야 하니 혼자서는 위험할 것 같아 동네친구인 잠첸을 3일 동안 쫓아다니며 같이 가달라고 졸랐다.


“잠첸, 가이드해줘. 너 할 일도 없잖아.”

“하... 내가 질문 하나 할게. 송, 넌 왜 고생을 사서해?”


고생은커녕 우리가 다 같이 산행을 할 생각을 하니 설레어 죽겠다. 이왕 가게된거 여러 명이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다. 나는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트래킹 멤버 구함’이라고 크게 쓴 뒤 쭉 찢어 잠양의 카페에 붙여두었다. 놀랍게도 예쁜 한국인 언니가 신청해 주어 첸과 그의 친구, 나, 예쁜 언니, 눈언니 이렇게 다섯으로 산행을 가게 되었다. 잠첸은 내 짐을 들고, 그의 친구는 트래킹 전문가로 텐트를 포함한 여러 가지 짐을 꾸려왔다. 숟가락부터 이불까지 없는 게 없으니 든든하다.


등반 4-5시간 정도 지나면 매직뷰 카페가 있다. 어찌나 반가운지 낡은 파란색 지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곳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중간 휴게소 개념인데 간단한 스낵을 비롯 메기(인도라면)도 주문하면 사장님이 끓여주신다. 해발 2000m 고지에 이런 상점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여기서부터는 고지대의 날씨를 경험할 수 있다. 찬 바람이 불었다가 갑자기 구름이 몰리며 비가 쏟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뜬다. 이때부터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붙인 별명이 ‘고지대 날씨 같은 여자’이다. 나도 나를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기에.


매직뷰카페에서 한 시간쯤 더 오르면 드디어 트리운트 정상이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의 변화를 피할 수 있는 꽤 큰 건물이 하나 있고, 곳곳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정상의 뷰를 만끽하며 잠깐 쉬고 있는데 잠첸의 친구가 걸음을 재촉한다. 지금 가지 않으면 날이 저물 때까지 오늘의 목적지 봉우리에 갈 수 없단다. 나는 할 수 없이 남은 힘을 짜내 산행을 시작했다. 예쁜 언니도 걱정과 달리 씩씩해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니 트리운트까지의 코스는 애교다. 경사가 훨씬 더 가팔랐고 돌이 많아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은 일쑤였다. 고도가 높아지니 숨도 시원하게 잘 쉬어지지 않는 느낌에 머리가 아파왔다. 남은 봉우리까지는 세 시간, 우리는 점점 웃음기가 없어졌고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때 잠첸이 뛰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언덕들이 많았는데 전부 다 거대한 바위다. 그 언덕들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급기야는 내 모자를 가지고 도망을 간다.


“웃기려고 그러는가 본데, 하나도 안 웃겨 잠첸.”


잠첸을 따라 바쁘게 오르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이다. 우리는 판판한 장소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냥 천막 같아 보였는데 나무기둥을 여기저기 세워 지지하니 꽤 크고 구색 있다. 잠첸의 친구는 마법의 배낭에서 소꿉놀이 같은 주방도구를 꺼내더니 뚝딱뚝딱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양파랑 당근을 깍둑썰기 해서 가져온 잠첸의 친구가 위대해 보인다. 물을 붓고 밥을 하고 야채와 카레가루를 섞는 것까지 본 것 같은데,


“송, 일어나 밥 먹어."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맛있는 냄새가 텐트 가득 퍼져있다. 일등 신랑감 잠첸의 친구에게 플러팅 치고 너무 저돌적인 질문을 했다.


“와, 카레 진짜 맛있어. 완전 일등 신랑감이잖아. 너 나랑 결혼할래?”


모두가 깔깔 웃고 난리 났다. 숨죽여 기다린 친구의 대답.


“나 다음 달에 결혼해. 다들 초대할게.”

"와, 축하해!"

“역시 여자들이 이런 남자를 보고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지.”  


실컷 웃으며 그릇 정리를 하러 밖으로 나온 순간 너무 놀라 숨이 멎었다. 나는 지금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수 만개의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광경을 보고 있다. 잠첸이 준비해 놓은 설거지통에 대충 그릇을 정리하고 다 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누웠다.


“별똥별 떨어진다!”


소름이 돋는다. 별똥별이 이렇게 자주 떨어져도 되는 것인가? 원래 이렇게 자주 떨어지는데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이었나? 경이로운 자연에 압도되어 황홀했던 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차오른다.


다음날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산 중턱에 서서 땀을 식히며 해 뜨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물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조금만 마시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더 이상은 못 가겠다는 나를 일으켜 세워 억지로 밀고 올라간다. 정상에 올라서서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고 숨을 고른 뒤 아름다운 고행을 사진으로 남겨본다.


해냈어. 우리가.


인생과 닮아있는 트래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울었다. 한 명이 울기시작하는데 왜 우냐고 묻질 않고 덩달아 모두가 울기 시작한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각기 다른 사연들이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왔다. 그만 두고 싶은 순간에 오늘처럼 나를 일으켜 세워 밀어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이 순간을 껴안고 또 한동안을 잘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24화 악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